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347
난 어떤 사람이었을까?
기억할 만한 사람으로 남았을까?
어쩌다 가끔씩 궁금하고, 함께 한 시간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하는 사람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고 헤어졌다. 한때 맺은 인연으로 여전히 안부를 묻는 사람은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을 포함한 극소수, 대부분은 그 시간과 그 장소를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가족을 제외하고 학교와 사회에서 만났던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지 가끔 궁금하다. 연락처 정리를 거의 하지 않는 게으름 덕분에 이름 석자만 남은 사람들도 카톡 친구로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크게 신경 쓰지도, 그렇다고 삭제하지도 않은 채 방치되어 길게 늘어진 목록이 세월의 흔적을 증명할 뿐이다. 카톡, 페북, 인스타 등 SNS 덕분에 마음만 있다면 곧바로 추적이 가능하지만 그 정도로 알고 싶은가, 알아서 뭐 하겠냐는 생각에 그만, 그만하며 멈칫한다. 그러다가도 잔잔한 마음이 심하게 흔들릴 때 눈은 카톡 프로필로 향한다.
그날, 1시간가량 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일상의 고단함을 풀고 싶었던 친구를 만났다. 점점 악화되는 엄마의 치매증상에 친구와 그녀의 가족들은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친 듯했다. 어떤 희망도 없이 노년의 슬픔과 고통만이 남아있는 것 같아 듣는 내내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그런 내 눈을 사로잡은 카톡 프로필이 있었다. 해맑은 얼굴을 한 아이의 모습에 배시시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이리도 부자가 닮았을까? 그냥 1+1 같은 느낌이었다. 나에게 잠시라도 웃음을 준 그 아이의 아빠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좋은 관계로 남은 분, 은인처럼 감사한 분이라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카톡창을 열고 인사를 전했다.
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서글서글한 목소리. 안부를 물었다. 울산에 내려가기 전에 연락을 했으니 여전히 내가 울산에 살고 있는 줄 아셨다. 십 년도 더 전에, 지방 계약직 공무원으로 근무했을 때 같은 팀 7급 공무원이셨다. 여직원이 많은 팀에서 귀한 남자 직원이었고 옆집 오빠 같은 털털하게 편한 분이셨다. 남편과 동갑이라 이미 그때도 노총각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다른 계약직 공무원이 한 명 더 있었는데 내가 사는 아파트 건너 단지에 살고 있었다. 근처에 사는 것도 신기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둘 다 첫 아이를 임신했다. 당시에는 나도 그녀도 뚜벅이였다. 그 직원의 남편이 가끔 픽업을 오기도 했지만 보통날에 우리는 버스를 타고 퇴근했다. 그런 우리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어느 날부터 빨간색 프라이드를 모는 미혼남이 임산부 두 명을 태우고 다녔다. 임산부 2명과 태아 2명을 포함해 4명을 모신다는 부담감과 책임감으로 매번 거북이처럼 안전운전을 하셨다.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아무리 지나가는 길이라도 쉽지 않았을 텐데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일주일에 몇 번씩 집 근처에 내려주셨다. 첫 임신에 몸과 마음이 힘든 시간이었지만 덕분에 버스를 갈아타지 않고도 편히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그 기억이 참 오래갔다. 훈훈한 정이 있는 그분이 좋은 인연을 만나기를 모두가 바랬지만 생각보다 짝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결혼 후 낳은 붕어빵 아들이 올해 5살이라고 했다. 뱃속에서 은혜를 입은 내 아들은 15살인데... 어느새 숱한 나날들이 지나갔다니. 내일모레 60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하셨지만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여전히 40대 초반이었다.
힘들어 죽겠다, 주기만 하는 것 같아, 돌봄자로서 피할 수 없는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생각보다 빨리 괜찮아졌다. 자라는 아이를 보고, 옛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충분했다. 타인으로부터 받았던 호의가 보이지 않는 기운으로 나를 토닥거렸다. 추석 지나고 한번 보자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