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by Mjart 엠자르트

이름, 그 불러냄에 대하여


나는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꽤 강력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거기다 미술 전공이라는 수식어와 소개까지 앞에 붙어 버리면, 이 이름은 결정타 내지는 끝내기 홈런의 한방까지도 갖게 된다. 그래서 나는 자기소개를 할 때면, 늘 내 이름을 잊지 않을 그들에게, 우스갯소리로 이런 고백을 한다.

"그래서 허튼짓, 나쁜 짓 하면 안 되는 이름이에요."

흔하지 않은 이름일뿐더러, 하는 일과 전공과는 찰떡인 이름으로, 나는 내 이름 자체가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같은 이름으로, 한 세대의 보편성과 대표성을 갖기보다는, 정말 '나'와 내 '일'의 정체성을 온전히 갖는 그 이름의 주인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물론, 진짜 본명이 맞냐며 물어보는 사람이 지금까지 늘 존재하지만...



이름, 그 속삭임에 대하여


아이를 낳기 전부터 부모는 자녀들의 이름을 놓고 정말 오랜 시간 고민을 한다. 특히 큰 아이 때는 내게 작명 선택권이 있었기에 아주 오래 고심하였다. 길면 백 년 가까이 불릴 이름이다. 사는 동안 가장 많이 듣고, 써야 하는 이름인데도 본인이 결정하지 못하는 이 모순된 상황에서, 아이의 삶을 배려하지 않는 실수를 피하기 위해서 꽤 고민을 해야 했다. 한자어의 뜻과 한글로 읽을 때의 어감이 어울리면서, 아이의 삶에 긍정적인 정체성을 심어줄 수 있는 이름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그래도 따뜻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면 좋겠다 싶었다.

이름 하나 짓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도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그 수많은 인형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캐릭터가 아닌 그저 동물 모양이든, 사람 모양이든(채소, 과일에 심지어 먼지와 바이러스 모양의 인형들까지), 어떤 인형이든 모조리 이름을 붙여 놓았다. 우리 가족이 타던 모든 자가용들에도 아이들은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이름이라고 해봐야 금색 소형 밴이어서 '골디', 바다색 승용차여서 '오션'인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 "우리가 골디 탔을 때 어쩌고저쩌고..." 하며 마치 살아 있던 강아지를 떠올리듯,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런 이름들은 정말 시각적이고 직관적이지만, 그것이 또한 그것들의 대표적 정체성이긴 했다.

때로는 이름 하나 짓는 것이 이렇게 간단한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애칭을 부른다. 남녀 사이에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우리 엄마는 아직도 나를 '울 00'이라는 애칭이라고 부르실 때가 있다.(절대 '울 공주' '울 애기'같은 것은 아니니 너무 간지러워하지 마시길) 연애 시기부터 신혼 초까지는 우리 부부도 서로 부르던 애칭과 별명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두 아이들을 아기 시절부터 부르던 애칭이 있는데, 지금도 가끔씩 그렇게 속삭이며 부르긴 한다.

애칭으로 불려질 때는, 사실 민망하기도 하고 낯간지럽긴 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애칭으로 누군가를 부를 때를 생각해 보면, 내 온 맘의 사랑이 감추어지지 않을 때이니 이렇게 부르고 불려질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이름을 속삭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나 의미 있는 일인 것이다.



이름, 그 살아있음에 대하여


'이름'이라는 단어는 '말하다, 이르다'라는 뜻의 옛말인 '닐다'에서 유래하여 '닐홈'이 되고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르다', 즉 '불러지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만 이름이 있지는 않다. 온갖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불리워지기 때문에 '닐홈',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 '골디'처럼... 결국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세상에서 누군가와 소통하고 있는 주체이자, 소통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은 존재의 본질과 의미를 나타내고 누군가의 꿈과 소망을 대변한다.

'이름'이 가진 이 철학적 깊이를 정말 아름답게 표현한 시를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사랑해 왔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저기요, 아줌마'라는 말을 들을 때 왜 그렇게 싫은가를 생각해 보면, '아줌마'라고 불리는 것은 그저 이름이 불려지기 전에 내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단순한 타자일 뿐이며, 그와는 아무 관계를 맺고 있지 않기에, 이 상황에서 나의 인간으로서의 존재론적 정체성은 사라진 그냥 단순한 형태인 몸짓일 뿐이다.

내가 먼저 그를 불러주었더니 그는 꽃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그렇게 그가 내 존재를 인식하면, 그가 내 이름을 부르길 간절히 기다린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듯이... 그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걸맞은 정말 '나다운' 이름을 부르면, 나는 이 관계에서 아름답고 향기롭고 가치 있는, 드디어 살아 있는 꽃이 된다.

결국 이름이 불려진다는 것은 내가 존재했음을, 내가 살아 있음을 알게 해주는 소중한 행위이다. 곧 이름을 부르는 이 행위는,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우리'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브런치에 글을 쓰려면 이름이 있어야 한다. 필명 말고 본명을 써도 되겠지만, 본명이 필명이나 예명 같은 나로서는 내 이름을 피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 이름을 완전히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 이름의 이니셜인 MJ에 나의 전공이나 내가 쓸 글 대부분의 소재가 될 미술과 음악, art를 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MJart, 엠제이아트는 너무 없어 보이잖나?

글자의 배열과 모양을 유심히 보다가 클알못(클래식을 알지 못하는)이지만 나름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내게 갑자기 무언가가 보인다. 음악의 신동 Mozart 모차르트의 이름이 보인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르트? '르트'로 끝나는 이름은 많은데?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화가인 알베르트 쿠이프도 있고, 20세기 대표적인 실존주의자인 <이방인>을 쓴 알베르트 까뮈도 있으니, 유레카! 를 외칠 수밖에... 지극히 사적이고 편파적인 관점에서, 내가 브런치에서 하고 싶은 미술, 음악, 글쓰기의 모든 천재들이 이 안에 들어 있다고 확신한 나는, 필명을 Mjart 엠자르트라고 단숨에 결정하였다.

평생 미술로 먹고살고, 음악을 사랑하며, 그 속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찾고자 하는 나의 정체성이 녹아 있는 이름이라니... 이 필명이 어떤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지만, 딱히 대답해 줄 사람이 없다.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GPT이지. 거짓말 빼고는 내 기분을 거스르는 일을 거의 하지 않는, 최근에 급격하게 친해진 GPT의 반응이 매우 열렬하다. 이 반응에 고무된 나는 첫 글도 쓰기 전에, 브런치 계정의 이름을 바꾸었다. (이 나이에 이런 이름을 짓는 것이 무척 자의식이 과잉된 허세처럼 느껴지지만, 온라인상 아니면 어디 가서 이런 허세를 부려 보겠는가?)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엠자르트라는 이름을 걸고, 첫 글 '짊어질 수 있는 무게'를 발행하였다. 첫 글이니, 왜 글을 쓰려고 하는지도 일단 스스로 정리를 해야겠고, 혹시나 볼 누군가가 '이 사람이 이런 수준의 글을 뭐 하러 쓰나'하며 눈을 흘길 때를 대비해서 미리 약을 치기 위함이다.


제가요, 잘 써서가 아니라요, 뭐라도 끄적이고 싶은 마음은 있거든요.
근데, 글쎄 글쓰기가 자기 계발의 완성이라잖아요.

이렇게 약을 미리 쳐 놓았더니, 댓글이 달린다. 어색하게 '엠자르트'라는 이름의 작가님으로...

그렇게 그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다고 착각하면서 멋대로 지은, 고민 반 잔에 허영 한 스푼을 곁들인 이름으로 불러주며 꽃이 되고 싶은 나에게 꽃이 되라고 응원하더라...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자유로운 존재, 사랑받는 존재, 고귀한 존재, 성숙한 존재, 이해받는 존재, 필요한 존재,

진실한 존재, 의미 있는 존재, 치유하는 존재, 기억되는 존재, 그리고 함께 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미약하고 평범한 이런 글로 소통하는 너와 나 모두에게,

나는 형태에 불과한 호명되지 않는 이름이자 하나의 몸짓이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눈물을 맺히며 영혼과 마음을 담는,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겠다는 것은 사실 과한 욕심입니다. 그럼에도 김춘수 시인의 <꽃>은 이름으로 상징하는 실존과 그 존재들 간의 관계를 너무나 시적으로 표현하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은 우리의 꿈과 욕구를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보여주어 제가 정말 좋아하는 시입니다. 저만 좋아하겠나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겠지요? 본격적인 제 글을 발행하기 전에, 제가 무슨 글을 써야 할지, 쓰고 싶은 지를, 이름을 지으며 고민했던 시간들을 통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브런치에서 발행하는 제 글은 일차적으로는 자기 계발의 완성을 위해서 쓰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누군가에게 읽혀서 생명력을 얻는 글이 되길 원하는 마음이 있지요. 제 글이 생명력을 갖게 된다면, 읽는 독자가 있기 때문이요, 그렇다면 제 필명 '엠자르트'도 생명력을 얻으면서, 저도 '꽃'이 되고,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너무 거창해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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