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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해리 Sep 06. 2023

19. 철야 , 도망가지는 말자. 달려 나갈 수 없다면

사우나 철야 , 빈 사무실 철야 , 방구석 철야 , 외지 철야 경험 기타

철야 , 달려 나가지 못한다면 도망가지는 말자. 어느새 나의 신조가 되었다. 


시작은 이랬습니다. '오늘은 좀 더 회사에 남고 싶다' 잠 많은 저로서는 얼른 집에 가서 쉬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날만은 '회사에 오래 있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회사 인근 사우나에서 간단히 씻고 밤을 지새웠습니다. 유별나죠?


철야 그 의미는 몰랐지만.. 


1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나는 모 회사 계약직 직원. 정직원이 아니었습니다만, 커다란 빌딩에 나만을 위한 작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무탈하게 일과시간을 보낸 어느 날, 팀 주요 프로젝트로 모든 팀원이 거의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물론 정규직에 한해서 말이죠.


그 말인 즉, 제가 퇴근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눈치 안 봐도 되는 거예요. 모두가 야심 차게 밤샘을 준비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건물 중앙 엘리베이터 앞에 혼자 섰을 때 문득 들었어요. '오늘은 회사에 좀 더 있고 싶다' 


다시 카드키를 찍고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팀 업무를 조금 받아서 할 수 있었어요. 자정이 넘어가고 있고, 다른 팀들은 퇴근해서 텅텅 빈 건물에서 우리 팀은 각자 뻐근한 어깨와 목을 주무르고, 눈을 비비며 밤샘 근무를 하였습니다. 힘들지만 고되지만 알 수 없는 흥분. 그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런다고 계약직이 정규직이 되지 않았지만 살아 있으니까 무언가라도 한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루종일 여기저기서 몸에 밴 꿉꿉한 냄새는 회사 근처 사우나에서 씻겨냅니다. 사우나 빨간 가마솥 사인을 뒤로하고 텅 빈 오피스 빌딩 숲에서 다시 사무실로 향할 때 그랬어요. '이런 게 일하는 맛이구나.'


철야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밤이고, 낮이고 나는 자기 일에 몰입하는 팀원분과 함께여서 행복했고 묘한 희열까지 느꼈습니다. 돈으로 절대 살 수 없는 가치였습니다. 


철야 역사를 이어받아서..


항공사 근무했을 때가 생각났어요. 벌써 계약직 근무하던 회사를 떠나 몇 년이 흘렀을 때였죠. 항공사에 입사해서 철야 근무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가끔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사무실 밖 풀벌레 소리가 좋았습니다. 나의 첫 번째 철야 근무는 열정 끄뜨머리에서 추억이 되었습니다. 젊고 영(young)한 열정이 파이팅 넘쳤고.


이번 회사에서는 책임감 하나 그리고 나만의 개똥철학 '일에 대한 의미'에서 철야 근무를 기꺼이 해냈습니다. 한 번은 밥을 먹지 못해서 새벽 2시 회사 앞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요, 잊고 있었던 추억이 생각나서 뭉클하더라고요. 싹싹 긁어서 밥알 한 톨도 남기지 않았었죠. 그리고 탄산음료 한 캔. 다른 날은 몰라도 철야 근무하는 날에는 그만한 행복이 또 없습니다. 


나는 이때 변태처럼 은근히 철야 근무를 즐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변이 조용해서 집중하기 좋았고, 업무와 업무 사이 텀이 생겨서 잠깐 딴생각을 하면 또, 이 사무실 '멍'만큼 맛있는 것도 없어요. 바깥에서 보면 별일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나에게 주어진 업무가 아무리 작아도 거기서도 제법 희열이 있었습니다. 해결하는 맛이 있거든요. 사무실에서 집까지 걷기에는 좀 멀고 자전거 타면 30-40분 이내로 갈 수 있어서 철야 근무가 끝나고 아무도 없는 새벽 거리를 자전거로 냅다 달리면 그게 또 달콤합니다.


어느덧 나는 자영업자 대열에 끼어들었지만 철야는 또 삶이거니..


퇴사하면 철야는 없을 줄 알았죠. 정해진 시간이 없고, 또 내가 마음먹는 대로 쳐낼 수 있으니까 철야라는 단어는 이제 안녕 / 인 줄 알았어요. 뭐 좀 한다고 자동으로 잠이 오지 않고, 또 누군가 급한 업무가 생겨서 긴급히 나의 힘이 필요할 때 함께 철야에 돌입해 주고, 또 압박감은 없지만 내가 기어코 해내겠다 일념 하나로 밤을 새우는 경우도 허다하니. 


회사라는 곳을 떠나며 '다시는 철야란 없을 거야' 호언장담하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여의도 통유리 건물, 시청 인근 사무실, 판교 사무실, 공항 터미널에 딸린 사무실, 공항 인근 소형 사무실, 프랜차이즈 본부 사무실을 가장한 회의실 구석 '사무실's 경험이 철야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확신했어요. 속으로는 나도 모르게 철야 매력에서 허우적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면서.


가끔은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왜 나는 철야 근무를 좋아했을까? 일찍 퇴근한다고 해도 어차피 집에 가서 밥 먹고, 유튜브 영상 축내며, 다가올 내일을 먼저 걱정하는 삶이 지루하지 않았나? 철야를 하면 몸이 피곤하기 마련인데 나는 어느새 피로가 주는 자극에 중독이 된 걸까?


지금 내가 철야 근무를 한다는 건..


열정, 책임감은 아닙니다. 복합적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도망가지는 말자는 것 하나. 천재성을 띄고 우사인 볼트처럼 단판에 승부를 봐야 하는 게임에서 희열을 느낀 적이 많지 않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도망가지 않는다면 결국 나는 해낼 것이다. 앞으로 치고 나가는 건 보통인데, 버티는 건 꽤 하니까. 


00아, 일 앞에서 도망가지는 말자. 달려 나갈 수 없다면. 철야란 이렇습니다. 도망가지 말고 스프린트 단거리 주자보다 버티는 놈이 되어버리는 것. 시간이 좀 걸려도 해내는 것.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아는 몇 안 되는 장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네, 철야했습니다. 철야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기꺼이. 의도적으로. 철야해낸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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