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라피스 라즐리 - 3
재즈 클럽은 카트만두 왕궁과 공원이 있는 중앙도로를 건너 영사관 골목을 벗어난 작은 도로변에 있었다. 우릴 데려가 준 사람은 미국 국적의 마이클로 가든 하우스에서 만나 얼굴을 익혔다. 그는 호리호리하고 유난히 허리가 길었으며, 어딘지 팔랑팔랑 하게 들리는 LA 식 영어를 구사했다.
재즈를 처음 들었던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회사일로 반년 간 미국 연수를 다녀오신 일이 있었는데, 귀국하시면서 온갖 선물을 사 오셨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인라인 스케이트와 슈퍼마리오 게임기, 그리고 빅밴드 재즈 컬렉션 앨범이었다. 앨범에는 듀크 엘링턴이나 찰리 버넷, 토미 도로시, 글렌 밀러가 참여한 곡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평일엔 클래식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음악이 선곡되었고, 아버지가 계시는 휴일 낮엔 간혹 빅밴드의 재즈가 온 집안을 가득 메우기도 했다. 동생과 내가 엉터리 발레를 추게 만드는 어머니의 차이코프스키도 좋았지만, 주말 오후를 그윽하게 채우던 아버지의 재즈는 두근두근 왠지 설렜다. 트럼펫과 콘트라베이스의 오랜 친구 같은 조화가 좋았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피아노 즉흥 독주는 그보다 더 좋았다. 그렇게 시작한 재즈에 대한 애정은 래그타임과 블루스, 스윙과 프리재즈 등을 고루 거치다가 어느덧 일상의 BGM으로 자리 잡았더랬다.
“여긴 어떤 재즈 클럽인데?”
미로 같은 영사관 골목을 걷다가 물자 마이클이 코끝에 걸친 안경을 손끝으로 쓱 밀어 올리며 답했다.
“라이브 연주를 한다고만 알아. 나머진 가보면 알겠지.”
클럽은 허름한 입간판이 세워진 3층 건물의 2층부터였다. 비좁고 가파른 목재 계단을 올라 황토를 바른 내부 벽이 나오면서부터 곧장 클럽이다. 그런데 재즈 클럽이라더니 안에선 레게음악이 더덩실 흘러나온다.
클럽 안은 좁지만 천장이 높다. 3층은 입구 오른쪽 바 옆의 계단으로 연결되는데, 나무 계단은 발을 디딜 때마다 몹시 삐걱거렸다. 「타히티 여인」의 피부색으로 빛나는 주홍색 벽엔 앨범에 끼우거나 그대로 붙여놓은 뮤지션들의 흑백 사진들, LP판과 뉴욕 타임스의 신문 기사, 모조 신호등, 원주민의 창칼과 방패 따위가 어지러운 질서로 장식돼 있었다.
작은 스테이지는 바 맞은편에 있었다. 스테이지는 객석과 높이가 같았다. 아치형의 입구와 낡은 커튼 한 장이 둘 사이의 경계였다. 빈 무대엔 드럼 세트와 앰프, 마이크와 키보드가 세팅돼 있었다. 클럽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벼서, 텅 빈 무대가 어딘지 이질적이다.
“재즈 공연은 7시 30분부터래. 아직 1시간 정도 남아있으니까 위에서 저녁 먹고 내려오자. 여긴 너무 복잡하다.”
마이클의 말에 나와 캣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올라갔다.
3층은 카우보이 펍 같던 2층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2층의 소음은 까무룩 멀어지고 고요함이 가라앉은 전통 찻집 같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바닥엔 양탄자가 널찍이 깔려있고 긴 좌식 탁자 양 옆으로 방석이 놓여있다. 탁자는 나무 기둥을 통째로 반으로 쪼개 단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것이다. 2층과 달리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린 거리가 내다보이는 발코니 탁자에 앉았다. 발코니 바닥은 3층보다 살짝 낮아 좌식이 아닌 입식 테이블을 놓아두었다.
곧 십 대 후반 정도의 소년이 메뉴판을 가지고 온다. 나는 맥주와 야채 뚝바를 주문했다. 뚝바는 티베트 음식이다. 티베트에서 망명해온 이주민들이 카트만두와 포카라에 살기 시작하면서 이곳 어디서든 먹을 수 있게 됐다. 네팔 음식은 의외로 기름기가 제법 있어서 티베트 음식을 먹으면 입안이 그런대로 개운해졌다. 캣은 튀긴 모모와 맥주, 야크 고기를 넣은 뚝바를, 마이클은 돼지고기가 들어간 볶은 면과 찐 모모, 맥주를 주문했다.
소년이 주문을 받고 가자, 이번에는 요란한 레게 헤어의 남자가 등장했다. 생김새는 꼭 체로키 부족의 족장 같다. 그러나 입고 있는 옷은 찢어진 청바지와 얼룩덜룩 페인트 자국이 튄 검은 민소매 셔츠다. 맨발에, 목에는 알이 굵직한 목걸이가 걸려 있다. 컨셉이 심히 궁금한 이 남자는 이 클럽의 주인이란다.
“난 맥스. 처음 온 친구들 같은데. 맞지?”
“마이클. 이쪽은 캣과 재인.”
맥스와 마이클이 악수를 나눈다. 맥스는 영어 이름을 쓰는(?) 네팔인으로 젊은 시절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세계 각지를 떠돌다가 이제야 고국에 정착하게 됐다고 했다. 산전수전, 긴 모험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고국의 이방인 같은 모양새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 아미고Amigo!” 라더니, 제 친구들이 있는 탁자로 돌아갔다. 거기서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떠들기 시작했다. … 진짜 정체가 뭘까?
20여 분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리고 라이브 공연 티켓도 함께였다. 포함되어 있었다. 급사 소년은 “연주를 들으시려면 티켓을 사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티켓값은 300루피. 이곳 물가를 생각하면 제법 비싸다. 가격을 들은 캣과 마이클의 표정은 급 회의적이 되었다. 하지만 난 연주를 꼭 듣고 싶었으므로 얼른 돈을 냈다. 그러자 캣과 마이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표를 산다.
캣이 물었다.
“망설이지도 않네. 재즈 좋아하나 봐?”
“응. 좋아해.”
“난 들어도 잘 모르겠던데. 록음악이 훨씬 취향이야, 나는.”
“나야말로 록은 썩 취향이 아니야.”
“그럼 어떤 재즈가 좋은지 물어봐도 돼?”
“음…… 래그타임이나 빅밴드, 스윙. 그런데 어지간한 하위 장르는 딱히 가리지 않아.”
듣고 있던 마이클이 “취향이 클래식하네.” 란다.
“모던 재즈랑 퓨전 많이들 듣던데, 그건 별론가?”
“안 듣는 건 아니지만, 역시 옛날 재즈들만큼 확 오지 않는 달까.”
“아아, 왠지 알겠다.”
마이클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캣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간장을 왕창 끼얹어야 겨우 먹을 수 있었던 비릿한 뚝바 한 그릇을 비우고 난 뒤, 맥주를 들고 2층으로 내려갔다. 마침 도착한 연주자들이 무대에서 악기를 조율 중이다. 나는 스테이지가 절반 정도 내다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주는 7시 40분이 지나서야 시작됐다. 오프닝 곡은 Queen의 <I was born to love you>다. 원곡을 감미로운 재즈로 편곡했다. 뒤를 이어 <Hotel California>와 Sting의 <Shape of my heart>가 연주된다. 모두 쉽게 즐기기 좋은 대중적인 선곡이다. 정통 재즈는 아니지만, 그래도 좋다.
다음으로는 곡명은 모르지만 귀에 익은 몇 곡이 연주되었다가, 잠시 연주자들의 휴식 타임이 이어졌다. 그 사이 새로 주문한 맥주와 감자튀김이 나왔다. 캣은 지루한 얼굴로 튀긴 감자를 날름날름 입에 넣었다.
드디어 두 번째 세션이 시작됐을 때, 귀가 번쩍 트인다. 살며시 뺨을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드럼 연주로 시작되는 첫 소절. 그 위로 섬세하게 얹히는 악기들의 음색이 순식간에 독특한 소리의 세계를 쌓아 올린다.
그들의 재즈는 낯설다. 내가 아는 어떤 재즈와도 다르다.
재즈 특유의 박자감과 쓰이는 악기들이 아니었다면 재즈임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마이클, 이게 무슨 곡인지 알아?”
“나도 처음 듣는데. 아마 로컬 재즈겠지.”
깊숙이 파고드는 선율은 짙고 관능적이다. 불투명한 정체성 속에서 더욱 자유로워진 혼돈이 요염하게 소용돌이친다. 언뜻 듣기엔 퓨전 재즈에 가까운데, 느낌은 모든 장르를 초월한다. 이름 모를 전통악기는 나른하게 흐르는 음표 위로 이국의 색을 더한다.
난 눈을 감고 갖가지 빛깔로 난반사를 일으키는 음의 바다에 잠겼다. 거리의 잡음은 아득해지다가 끝내 완전히 소멸되었다. 소리가 가리키는 항로를 따라 표류하다, 별이 총총한 파도에 떠밀려 달의 뭍에 닿는다. 소리의 심해 깊숙이 가라앉은 세계의 낭만은 달콤한 꿈을 꾼다.
문득 찰칵,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언제부터인지 캣이 내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나 찍었어?”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놓치면 아깝지.”
캣이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고 덧붙인다.
“You look like high. You know that?"
공연은 두 시간 정도였다. 중간에 세 번의 인터미션이 있었다.
캣은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며 본격적으로 클럽과 사람들을 찍었다. 마이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조용히 연주를 들었다.
공연이 끝나 클럽을 나오니, 밤 10시다. 우린 가로등이 거의 없는 길을 더듬어 숙소로 향했다. 난 대로변을 벗어나서부터는 길을 기억하려는 노력은 깨끗이 포기하고 마이클에게 길잡이를 맡겼다. 골목들이 너무 복잡해서 어디가 어딘지 구분도 어렵고, 일단 사위가 몹시 어두웠다. 부엉이 같은 눈의 릭샤꾼과 허름한 소년이 옆을 소리 없이 스쳤을 땐 정말 오싹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눈에 익은 라짐빠뜨 거리가 나왔다. 그 후로 숙소까지는 금방이었다.
“오늘 덕분에 즐거웠어.”
“나도.”
숙소 대문 앞에서 마이클과 작별 인사를 하는 동안 캣은 카메라에 찍어놓은 사진을 돌려보느라 여념이 없다.
우린 잠든 마두를 깨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여태 봤던 중에서 가장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자는 걸 깨웠으니 성가실 법한데도, “클럽은 재미있었나요?”라고 상냥하게 물어온다.
나는 마두에게서 열쇠를 받아 3층의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잠시 어둠에 잠긴 카트만두 시내를 응시했다. 아직도 귓가엔, 재즈가 머물러 있었다.
아침형 인간, 저녁형 인간, 이런 이야길 많이 하는데,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를테면 나 같은.
나는 때가 되면 알아서 잠이 오고, 알아서 깨는 편이다. 낮과 밤의 경계는 의미가 없다. ‘7시간 이상’이라는 수면 조건만 채우면 나머진 딱히 상관이 없다. 그래서 오늘처럼 7시간을 채우지 못한 상태로 일어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미처 못 다 푼 피로가 하루치 기운을 독소처럼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이다.
난 침대에서 일어난 채 머리맡을 봤다.
왜 일찍 깼지? 밖은 재잘거리는 새소리 외엔 여전히 고요한데.
시계를 보니 7시다. 어제 몇 시에 잤더라……? 클럽에서 돌아와 어질러진 방 안을 정리하고 나니 새벽 1시가 넘었던 것 같다. 눈두덩이 따끔거리고 무겁다. 고작 맥주 두 병에 숙취로 이럴 리는 없다.
다시 잠들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대충 씻고 노트북을 챙겨 일어났다.
네팔의 5월 아침은 쌀쌀하다.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오늘 아침은 뭘 먹을까를 고민했다. 메뉴에 있는 음식은 이미 다 한 번씩 먹어봤다. 그래서 요 며칠은 가든 하우스 메뉴의 최고의 맛 조합 찾기에 도전 중이다.
로비의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켤 때까지도 밥 생각에 빠져 주위를 눈치 채지 못했다.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알아차린 것은 아침 식사를 플레인 팬케이크와 꿀을 얹은 과일, 커피로 결정하고 마두를 찾으러 눈을 들었을 때다.
어느덧 가든 하우스에서 그다지 새롭지 않아 진 내 얼굴에 새삼 호기심이 돋을 리는 없는데?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웬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사람이 캣과 앉아서 날 보고 있다.
맙소사, 동양인이다. 그것도 이 가든 하우스에서 머무는 동안 나 외에는 한 명도 보지 못했던 극동아인!
“재인 눈 커진 거 봐.”
캣이 깔깔 웃는다. 그제야 아차 싶어 멋쩍어졌다.
새로이 등장한 여행자의 인상은 독특했다. 앳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잿빛 머리칼, 선명한 푸른색의 네팔 전통 바지 차림 위에 캐주얼 티셔츠. 덧니가 도드라진 치아는 단정한 표정과 묘하게 어긋난다.
아무튼 단연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머리칼이다. 잿빛에 가까운 색인데, 주근깨가 콕콕 박힌 얼굴과 어우러지며 오히려 신비스럽다.
대체 이 미스터리한 여자는 어디서 왔을까?
“혹시 일본인이신가요?”
“아뇨. 중국인이에요. 그쪽은 한국인?”
돌아온 것은 유창한 영어다. 빙긋이 웃은 그녀가 묻는다.
“나한테 일본인이냐고 묻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내가 일본인처럼 생겼어요?”
“살짝 그런 분위기가 나긴 해요.”
“희한하네. 상하이에서도 그런 말 많이 들었거든요.”
이름을 묻자, 아델이라고 대답한다. 홍콩이나 대만 사람은 영어 이름을 짓기도 해서 혹시 그쪽 출신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나는 쓰촨 성 출신이에요.”
쓰촨 성이면 중국 본토 아닌가?
“그럼 아델이 본명이에요?”
“아뇨. 본명은 다들 발음하기 어려워해서요. 일할 때도 불편해서 닉네임을 하나 만들었죠.”
그럼 본명이 뭐냐고 물어보려는데 마침 마두가 세탁물 바구니를 들고 로비로 들어오더니 우릴 보고 씩 웃는다.
“내가 말했죠? 선물이 있다고.”
엥? 뭔 선물? 나는 맹하게 마두를 보았다.
난 중국인이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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