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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Nov 05. 2021

오래된 자기 세뇌

마음클리닉 2

문장완성검사는 아동용과 성인용이 따로 있다. 당연히 내가 했던 문장완성검사는 성인용이다. 내가 썼던 문장완성검사지 사진을 찍어두지 않아서 인터넷에서 내용을 찾아왔다. 문장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나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을 때

2. 내 생각에 가끔 아버지는

3. 우리 윗사람들은

4. 나의 장래는

5. 어리석게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6. 내 생각에 참다운 친구는

7. 내가 어렸을 때는

8. 남자에 대해서 무엇보다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9. 내가 바라는 여인상은

10. 남녀가 같이 있는 것을 볼 때

11. 내가 늘 원하기는

12. 다른 가정과 비교해서 우리 집안은

13. 나의 어머니는

14.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잊고 싶은 것은

15. 내가 믿고 있는 내 능력은

16.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으려면

17. 어렸을 때 잘못했다고 느끼는 것은

18. 내가 보는 나의 앞날은

19. 대개 아버지들이란

20. 내 생각에 남자들이란

21. 다른 친구들이 모르는 나만의 두려움은

22.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23. 결혼 생활에 대한 나의 생각은

24. 우리 가족이 나에 대해서

25. 내 생각에 여자들이란

26. 어머니와 나는

27.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28. 언젠가 나는

29. 내가 바라기에 아버지는

30. 나의 야망은

31. 윗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나는

32.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33. 내가 다시 젊어진다면

34. 나의 가장 큰 결점은

35. 내가 아는 대부분의 집안은

36. 완전한 남성상은

37. 내가 성교를 했다면

38. 행운이 나를 외면했을 때

39. 대개 어머니들이란

40. 내가 잊고 싶은 두려움은

41. 내가 평생 가장 하고 싶은 일은

42. 내가 늙으면

43. 때때로 두려운 생각이 나를 휩쌀 때

44. 내가 없을 때 친구들은

45. 생생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46. 무엇보다도 좋지 않게 여기는 것은

47. 나의 성생활은

48. 내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49. 나는 어머니를 좋아했지만

50. 아버지와 나는

 

위의 문장을 보고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이어 적어야 한다. 그게 문장완성검사다.

 

완성된 문장에서 나는 가족, 특히 아버지, 어머니와 관련된 내용에서 분노를 드러냈다. 2년 전에 작성했던 것이라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른 가정과 비교해서 우리 집안은 최악이다.’와 같은 문장들을 가차 없이 써 내려갔었다. 내가 쓴 결과물을 보며 쓰게 웃었던 것도 같다. 의연하게 다 털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님을 향한 나의 분노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서. 원망의 크기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문장완성검사와 함께 받은 다른 검사지는 ‘나의 어린 시절은?’이라는 질문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문항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간의 일을 기억나는 대로 빼곡하게 썼다. 두 번째로 병원에 방문하던 날, 의사 선생님은 내가 쓴 답변들을 읽으며 한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본인의 경험인데, 굉장히 남이 바라보듯이 글을 썼네요. 엄마에 대해서 ‘엄마도 아마 그때는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적었고.’

 

내가 나의 경험을 제삼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듯 서술했다는 점이었다.

 

‘그게 특이한가?’

 

당시에는 의사 선생님이 왜 굳이 그 부분을 짚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감당하기 힘들었던 가정사를 친한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며 답답한 마음을 풀어왔고, 답변 또한 그런 식으로 작성했을 뿐이니까.

 

그런데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에서 상담했던 일들을 가만히 회상하다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특이하지 않다. 의사 선생님이 짚은 대로 내가 내 인생을 남 일 보듯 바라보는 건 이상하다. 그럼 나는 그동안 왜 내 인생을 남 얘기하듯 말했나. 친구들에게 말할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이번엔 이런 일이 있었다, 골 때리지 않냐?’

 

그래. 그랬다. 내 고통을, 집에 일이 터질 때면 한숨도 자지 못하고 숨 죽이며 밤을 지새웠던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말해왔다.

 

‘봐라. 나는 이런 일에도 아무렇지 않다. 내 인생에서 이런 일?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에피소드 중에 하나인 거야.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며 웃어넘길 수 있으면 그만인 거다.’라고 생각하면서.

 

왜? 어째서?


그러니까 내게는 그게 일종의 세뇌였던 셈이다.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을 만큼 나는 정말 괜찮다, 라는 자기 세뇌.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무뎌질 만큼 무뎌졌으니 괜찮다고 그렇게 위안 삼았던 거였다.

 

벼락같은 깨달음과 동시에 허망해졌다. 나는 어느 정도까지 망가지고 있었던 걸까. 이게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인가. 아니, 이상했다. 너무너무 이상했다. 어쩌면 그 이상함이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상담을 해온 의사 선생님의 눈엔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날 처음으로 내가 몰랐던 나를 봤다. 아주 깊은 우물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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