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에도 불려나오는 소환
※ 본 글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 독해 시도입니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해석은 정통 학술적 견해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필자의 사유 흐름과 해석적 재구성을 포함합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그린비, 문성원, 초판 2쇄 20240411
자기-자신이란, 담론의 신비스러운 도식 덕택에 “심리적 그림자들”의 다양성을 가로질러 동일자라고 선포적으로 선언된 동일화의 이상적 극이 아니다. 자기-자신은 존재자들을 담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동일성을 담지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주체는 “나는 나 자신이다.”라는 동일성을 통해 자기를 유지한다고 여겨진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하다고 믿고, 그 동일성을 통해 나를 자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나’는 존재자ㅡ개별적인 사건이나 인물이 아니라, 이미 언어 속에서 주제화되고 동일화된 것ㅡ를 담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참고
존재자들을 담지하는 방식은 ‘사물이 동일하게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에 비유될 수 있다. 예컨대 사과는 언제나 사과, 돌은 언제나 돌이다. 이런 것들은 주제화되고, 언어 속에서 동일하게 인식된다. 그러나, 진정한 ‘나’는 이렇게 사물처럼 동일성으로 주제화될 수 없는 존재다.
왜냐하면, 주체는 흔적과 경험을 통해 계속 다시 정립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체의 무의식은 바로 이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기록’을 품은 자리이고, 그 자체로 우리의 피조성을 증언한다.
존재자들은 번복함 없는 말해진 것으로서 동일한 것이며, 그렇게 하여 주제화되고 의식에 나타난다. 주체에서 자기-자신이 되돌아오는 해지 불가능한 회귀는, 동일화하고 모으는 —회상하거나 기대하는— 종합적 활동에 주어질 수 있을 법한 계기들 사이의 모든 구분에 앞선다.
존재자들은 번복할 수 없는 말해진 것으로서 동일하게 굳어지고, 그렇게 언어 속에서 주제화되며 의식에 나타난다. 그러나 주체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자신의 회귀는 단순히 이 동일한 이름들을 기억하거나, 해석하거나, 기대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구분에 앞선다.
참고
가령 “레비나스”라는 이름과 그의 사상들, 주요 개념들은 하나의 기표로 굳어져 동일하게 호출되는 ‘말해진 것’이다. 또한, 그는 지금-여기에 현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유와 공명해 이미 불려진 자리에서 응답을 요구받는 것처럼 경험하는 주체도 있다.
그 순간은 해석의 층위를 넘어서는 근원적인 끌림이고, 주체가 타자의 흔적에 의해 불려진 자리에서 자신을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자기-자신의 귀환’은 어떤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타자의 소환에 의해 발생하는 해지 불가능한 회귀이며, 그 자리에서 주체는 사명감을 부여받는다.
자기-자신의 회귀는, 의식이 미리 잡음과 다시 잡음의 시간적 놀이 속에서 중단되었다가 다시 회복함으로써 스스로를 밝히듯이 스스로를 늦췄다 조이면서 자신을 비추지 않는다. (...) 우리가 현상이라고 부르는, 또는 현상의 출현이 이미 하나의 담론이기 때문에 현상학이라고 부르는 전시와 은닉의 놀이에 참가하지 않는다.
자기-자신의 회귀는 의식이 과거를 다시 붙잡거나 미래를 기대하는 시간적 놀이 속에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단과 회복의 리듬 속에서 자신을 비추되, 현상학적 전시와 은닉의 놀이에 참가하지 않는다.
참고
레비나스가 말하는 회귀, 존재-저편은 비유적 표현이나 도덕적 차원으로 축소될 수 없는 영역이다. 그것은 언어가 상징적으로 덧씌운 개념이 아니라, 실재의 무게를 가진 경험에 가깝다. 나는 최근 어떤 체험을 통해 이와 비슷한 문제와 마주한 적이 있다. 그것은 병리학적으로 환원될 수도 있고, 뇌의 착각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 다가온 순간만큼은 설명할 수 없는 기억처럼 느껴졌다.
9월 2일, 이틀 동안 의식을 잃었다. 현실과 의식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시간 감각은 무너졌다. 온갖 전염병이 나돌고, 전쟁으로 죽어가는 장면들이 스친다. 인류가 신을 숭배하는 모습과 타락하는 모습들이 반복되고, 나는 그 사이에서 계속 죽고 살아나기를 거듭했다.
나는 미래와 과거 사이를 오가는데, 오직 물만이 나를 안정시켰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 어머니의 품처럼 느껴졌다. 이외에도 종교적 혹은 신화적 서사와 이어지는 장면들이 구현되었고, 그것은 내 무의식이 스스로 엮어낸 이야기 같았다. (...생략.)
우선, 나는 무신론자다. 그리고 가족들 역시 종교나 신화에 큰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내가 경험한 체험들은 신화적·종교적 장면의 형태를 빌려 나타났다. 이 점에서 모든 장면은 왜곡을 내포한다. 무의식은 결국, 내가 이미 지닌 이미지와 인상을 경유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령 무의식이 권력자의 형상을 드러낼 때, 그것은 나에게 현 시대의 권력자의 얼굴로 바뀌어 보였다. 전쟁 역시 결코 나에게 온전한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미쳐가는 사람들의 모습, 불 냄새, 집단의 분열, 꺼져가는 생명의 감각 같은 인상들이 경험처럼 스며들었다. 이후 의문에 도달했다.
1) 나는 왜 내가 체험하지 않은 기억을 경험하는가?
2) 신화와 종교에 관심이 없음에도, 왜 나의 체험은 그것들과 기묘하게 이어지는가?
3) 무의식이 타자의 담론이라면, 내가 본 것들은 누구의 기억이고, 어떻게 나의 체험으로 변환되는가?
자기-자신의 독특한 비틀림이나 수축을 와해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동사와 소유형용사, 통사론적 형태들을 사용하고자 한다. 자기-자신은 말거나 균열되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 동사와 소유형용사, 통사론적 형태들은 이미 이 자기-자신의 표식을, 이 비틀림과 이 수축과 이 균열의 표식을 지니고 있다.
자기-자신은 결코 안정된 동일성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늘 비틀리고, 수축되며, 균열되는 존재다. 우리는 이 불안정한 자기-자신을 붙잡기 위해 동사나 소유형용사 같은 문법적 장치들을 사용한다.
라이프니츠의 수수께끼 같은 문구인 “나는 그 자신에 본유해 있다”의 의미도 아마 이런 것이리라. “스스로를 유지한다”나 “스스로를 잃는다” 또는 “스스로를 되찾는다” 등에서의 “스스로”는 어떤 결과가 아니라, 이대명동사가 표현하는 관계들 또는 사건들의 모태(matrice)다.
“나는 나를 유지한다”, “나는 나를 잃는다”, “나는 나를 되찾는다”와 같은 표현 속에서 반복되는 ‘스스로’는 어떤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관계와 사건을 낳는 모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자기-자신이 본래부터 자율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수동성 속에서 이미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모든 기억과 모든 회상 이편에서,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 이미 묶인 달라붙음의 수동성이다. 그것은 회상에서 재현된 현재가 따라갈 수 없는 회복 불가능한 시간에, 자연이나 피조물이 그 흔적을 간직한 창조 또는 탄생의 시간에, 기억으로 전환될 수 없는 시간에 묶인다.
자기-자신은 ‘박해의 희생물’이다. 즉, 자기를 세우고 스스로를 주체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가 좌절되는 자리에서 형성된다. 기억과 회상으로 포착되지 않는 절대적 과거, 회복 불가능한 시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조와 탄생의 흔적을 간직한 시간이고, 결코 현재로 환원될 수 없다.
회귀는 기억 가능한 어떤 과거보다도 더 먼과거, 현재로 전환될 수 있는 어떤 과거보다도 더 먼 과거다. 피조물이긴 하나 태어날 때부터 고아인 피조물이다. 또는 틀림없이 자신의 창조주에 대해 무지한, 무신론적피조물이다.
자기-자신의 회귀는 그 어떤 과거보다 더 먼 과거로부터의 소환이다. 자기-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고아인 피조물”이다. 의식이 스스로를 파악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잡히지 않고, 오히려 응답을 요구하는 소환으로만 나타난다. 창조주가 있다고 해도 알 수없고, 따라서 무신론적일 수밖에 없다.
참고
여기서 무신론적 피조물은 종교인에 대한 비판이나 신의 부정이 아니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초월은 의식을 초과하는 영역이므로, 언제나 흔적이나 여운같은 방식으로만 남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자신은 창조주에 대한 무지(無知). 다시 말해 창조주가 있어도 알 수 없고, 유무 자체를 증명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의식의 자기 복귀의 이편에서 이 실체가 스스로를 보여줄 때 그것은 존재로부터 빌린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실체의 이 통일성 또는 이 단일성이 스스로를 고발하는 사건은 자기를 의식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회피 없이 응답해야 하는 소환, 자기를 자기로 소환하는 소환이다.
의식의 자기 복귀의 이편에서 실체가 스스로를 드러낼 때, 그것은 존재로부터 빌린 가면을 쓴다. 이 단일성이 스스로를 고발하는 사건은 자기를 의식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회피 없이 응답해야 하는 소환, 자기를 자기로 소환하는 소환이다.
참고
자기-자신은 의식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행위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이 도달하지 못하는 이편에서, 어떤 실체가 불현듯 나를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존재가 덧씌운 가면을 쓴 채로 나타난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이름, 지위, 역할은 모두 가면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너머의 자기-자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단일성은 사건처럼 스스로를 고발하며, 내가 나일 수밖에 없음을 폭로한다. 그 순간은 회피 불가능한 요청, 곧 응답을 요구하는 소환이다. 결국, 자기-자신은 내가 스스로 세운 것이 아니라, 타자의 호출 속에서 이미 불려 나온 존재다.
기억이 다가갈 수 있는 의식의 시간보다 더오랜, “깊은 옛날”에, 자기-자신은 실체로 드러난다. 이 실체에게 자기-자신이 존재자로 있는 존재는 가면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을 빌려온 이름으로서, 가짜-이름으로서, 대리-이름[대명사]으로서 지닌다. 자기에서 자기-자신은 존재로부터 분리된 일자다.
무지와 수동성의 자리에서 자기-자신은 드러난다. 자기-자신이 보이는 순간조차도, 그것은 ‘존재의 가면’을 쓴 채 나타난다. 우리가 붙잡는 이름, 정체성, 대명사— 그것들은 본래의 자기-자신을 가리는 대리 표식일뿐이다. 진정한 자기-자신은 존재로부터 분리된 “일자”로서, 기억과 현재의 시간 바깥에서 소환된다.
Point
죽음조차 사라지지 않는 흔적 속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진다. 중요한 것은, 그 책임이 지금-여기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의식은 무의식을 건져 올리는 역할에 불과하다. 그것이 실패하고 어긋나는 틈에서, 우리는 초월의 가능성을 마주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 끝나지 않는 책임이다.
※ 죽음을 초월하는 사유는 닫아버려서도 안되고, 희망적인 도피처가 되어서도 안 된다. 남겨둬야 할 것은 가능성, 붙들어야 할 것은 ‘지금’이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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