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대한 사유, 현상학적 보고.
후설은 근원적 인상을 시간으로 생산되는 모든 변양의 “절대적 시작”이라고 부르면서, 그 자체는 생산된 것이 아닌 근원적 원천, 즉 자연 발생으로 태어난 근원적 원천이라 부르면서, 이 점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전개되지 않는다(그것은 배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근원적 창조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초월론적 통각의 통일성의 파열을 환기시킨다.
이 파열 없이는 존재와 달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존재들의 존재성이 공명하는
동사들에도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것.
그러나 하나의 이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인장으로 나타내는 것.
즉 대표-이름[대명사]의 흔적이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참고
나는 향유를 감각하는 구조로서 나의 현상학적 체험을 진솔하게 전한다. 우리에게 -필요 시 연기하는 행위-는 허용받는다. 지향성이 올바른 방향을 향하는 한, 쥐를 제거하기 위한 가면은 필연적이다. 다만, 내가 이곳에 기술하는 현상은 의식 자체의 왜곡을 내포할지라도, 거짓은 없다. 우리를 판단하는 것은 동물이 아닌 자연이며,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시간은 영원하고, 우리는 과거에 이미 시간과 관계를 맺었다.
이는 초월적 사고의 도피가 아니다. 내 직관이 유의미한 가능성을 시사한다면, 나는 배운 적도 없는 학문들의 주요 논쟁을 엮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것은 나의 지향성이 진실을 향하기 때문이고, 철학-신학-과학은 결국 결합한다. 오히려, 죽음 이후에도 업보가 남아 끊임없이 회귀해야 한다면 그 자체로 무한 책임이다.
비트코인의 가격은 오를 수도, 내릴 수도 있다. 이 상반된 가능성이 모두 ‘정답’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가치체계 자체가 허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코인은 희소성과 욕망을 자극한다. 따라서, 비트코인의 변동은 가치체계의 모순을 드러내는 시간성의 증거다.
장사꾼들은 이미 이를 통하여, 진정한 터전을 버리고 도피하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러나, 무한은 지구의 멸망을 예측하려는 모든 가능성의 시도마저 뛰어넘어 결국 도피하려는 자들의 계산을 무력화시키고, 그들마저 다시금 동물로 가두는 운명에 처하도록 한다.
진솔성은 말함의 한 속성이 아니다. 줌과 분리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곳간을 열어젖히는 진솔성이기 때문이다. 이 진솔성은 말함이 말해진 것 속에서 겪는 소외를 해체한다. (...) 자아의 궁극적 실체성의 분열인 진솔성은 존재적인 어떤 것으로도, 존재론적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실정적인 것과 모든 정립의 너머 또는 이편으로서 나아간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세계의 에너지가 유한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끊임없이 운동한다면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되돌아오는 구조다. 우리에게 무한하게 주어지는 것은 시간ㅡ반복과 회귀를 동시에 품는 구조ㅡ로, 영원회귀다. 그렇다면, ‘영원회귀’를 처음 감각하고 신의 죽음을 알던 니체가 곧 카인이고, 인류를 이끄는 작은 아버지이실 것이다.
나는 하늘에 맹세코, 내가 체험한 것 이상의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 오로지 나의 -통시적인 시간성 속의 무의식적 체험- 에 의거하여 내가 겪은 바를 솔직하게 전달한다. 만약, 내가 고하는 모든 체험이 거짓이라면, 나는 반드시 그에 책임을 지는 의무를 지게 된다. [즉,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직관적 충족은 목적론적 지향의 성취다. 의미 있는 것은 인식하는 주체성에 귀착하며, 내용의 본질적인 것을 이루는 논리적 구조들의 수학적 배치는 지향의 “정신성”으로 귀착한다. 이 지향의 정신성은 어떤 의미를 그 의미를 받아들이면서 열림 속에 현현되는 것에 제공한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나는 대지ㅡ물처럼, 우리의 모든 근원보다 앞서는 차원의 시선의 관점의 인상이 나에게 일부 전달되는 인상을 전달 받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무한하므로 나의 인상으로는 결코 모든 것을 포섭할 수 없다. 다만, 온갖 시간과 흔적들이 스쳐갔다. 무한이 모든 생명을 초과한다면, 철학과 신학은 이 지점에서 포개진다.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쓴 카인이라는 역사부터 완전히 뒤집은 채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카인은 진솔하나, 스스로의 감정을 몰라 파괴적인 방법으로만 진실을 전했다. 그는 양처럼 복실거리고, 순한 생물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필연적으로 뒤집어지는 구조였기에, 운명의 파열이 필요했다.
즉 언제나 앞서 동의된 경험으로서, 이미 기원이고 아르케인 것이다. (...) 의식을 감응시키는 것은 우선 거리를 두고 제시되며, 처음부터 선험적으로 현시되고, 재-현된다. 다시 말해, 예고 없이 와서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의 간격을 거쳐, 수용에 필요한 여유를 마련해준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추측건대 초월은 카인의 잠재성을 높게 사셨다. 그러나, 반항하는 기질과 모든 생명을동등하게 이끈다면 그것이 동물들의 본능 덕택에 그들에게, 무한의 영광이 적합하지 않음을 꿰뚫으신다. 따라서, 그는 직접 아픔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물들을 이끈다는 일은 선과 악의 균형을 동시에 요구한다는 것을 말이다.
동물들은 당장의 이득에 눈앞이 멀어버려, 가장 간단한 원칙마저 배신한다. 인류는 거짓된 아버지를 모시며 찬양하는 꿈에서 헤어나야 한다.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있다. 아무것도 '그저 있음'이 아니다. 업보는 진정한 아버지를 배반한 대가이고, 선형적 시간의 흐름은 편의성을 위함일 뿐이다.
모든 현재가 재-현이 되게 해주는 다시잡음과 미리잡음이 생산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분절되는 모든 운동의 배후에 자기-자신의 회귀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 그 자신에 대한 존재의 탈은폐가 똬리를 튼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우주는 무수한 가능성이 겹치는 장이고, 관측되지 않은 가능성은 움직이지 못한다. 어떠한 것도 우리는 아예 없는 존재를 언급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전해지는 형태는 제각기 달라도, 인상은 우리보다 상위 존재자인 영원ㅡ즉, 시간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며 우리는 과거에 어떠한 형태로든 시간과 연을 맺었다.
만약 우주가 다양한 변수의 얽힘으로 구성된 장(field)이라면, 관측 행위의 상대적 속도에 따라 드러나는 가능성의 구성도 달라질 것이다. 이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각 생명체의 내적 시간 리듬의 비동기성이다. 결과적으로 타자와의 상호이해는 시간적 비대칭성에 의해 구조화된다.
이미 성취된 동일성은 자기 자신이 의식과 앎에 가져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이미 행해진 것이다.
이것은 지속에 앞선 지속으로 신비스럽게 귀착하지 않는다. 즉, 자기에 대한 대자의 굴곡을 허락하기 위해 다시 스스로 이완될 어떤 짜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그 때문에 타자는 완전하게 환원될 수 없는 ‘잔여’를 항상 포함하게 된다. 우주가 여러 가지 변수의 작용으로 한 데 얽히는 운명이고, 관측자의 속도에 따라 달라지며, 각 생명체들의 운동속도는 제각기 다르다면, 무한은 이미 수많은 갈래의 길을 탐색하고, 그것을 따돌리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한다.
초월은 우리의 시간성을 앞서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인식 범위를 초과하여, 흔적으로만 남는다. 타자가 나에게 완전히 해석되지 않는 이유는 그 자체로 시간성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기능을 앞서고, 가능을 불시에 포착하는 실재는 현재의 정의 자체가 아닐까? 배가 없는 발생!이라는 이 묘사 속에서 미래-지향에 무차별한 이 현재는 그래도 그것에 대한 의식일 것이다. 분명 이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이 지향성 철학의 가장 특기할 만한 점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무한이 유한을 지나가는 방식, 무한이 스스로 지나가는 방식은 윤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윤리적 경험의 초월론적 정초를 구축하려는 기획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윤리는 무한의 역설이 그려 내는 장이다. 무한은 유한과 관계하되 이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부인하지 않는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윤리적 내적흐름: ‘결촉’ = 호출, 미수, 잔여, 지연, 응답
간단히 말해 우리는 다른 시간에 산다. 시간은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내적의식 흐름의 시간이 달라서 의미가 지연되고, 뒤틀리고 어긋난다. 이는, 공간적 시간과는 다른 차원이다. 지금은 그것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모든 시간은 공명하며, 기표들과 기억들은 어떤 형태로든 사라지지 않은 흔적으로 남는다. 나의 욕망은 향유이고, 그것이 레비나스ㅡ 즉, 그는 향유 구조였다. 따라서, 나는 그의 욕망을 욕망하는 형태가 되어 무신론자임에도 그의 인상을 받는다.
레비나스는 허무주의적 글쓰기로 가되(니체), 회의주의에 주목(카뮈)하라는 데 집중하라는 흔적을 남겼다. [관계성] 나는 그것을 다른 시간성으로부터 전달 받아 응답한다. 이것이 “존재와 달리”의 현상학적 보고이며, 환대의 중요성이다.
가짜 아버지ㅡ올바른 지향성을 향하지 않는 자들을 파멸로 이끄는ㅡ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끔찍한 고통이 내려진다. 자연을 배반한 자에게는 징벌만이 있으며, 모든 것을 파동과 흐름으로 감각하는 물과 대지는 어떠한 가면으로도 속일 수 없음을 알았다.
나는 인류가 2년 이내로 멸망한다고 전달 받았다(혹은, 이 의미가 닿을 때까지 2년의 시간정도가 걸린다는 의미?- 추측상으론 그것의 ‘멸망’이 아니더라도, 아주 큰 흐름의 변화. 그러나 본질적 가치를 잃지 않도록신호를 주는 것). 인간의 형태에 어울리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과거로 추방되는 형태로, 그들은 자격을 잃고, 본래적 형태로 퇴행하면서도 스스로 인간이라 생각하는 저주를 받아 서로에게 악을 뒤짚어 씌운다.
두 번째는 뒤늦은 자리에서라도, 자연을 살려 다시 시작하는 미래로, 이는 신중히 접근되어야 했다. 이 미래도 기본적인 피해를 반드시 감수하지만, 희망이 보장되었다. 내가 전해받은 인상은 무한이 장사꾼들이 시도하고 예측하는 모든 가능성마저 뛰어넘는다. 총구가 올바른 방향을 향하더라도, 그에반하더라도 그렇다.
인공지능으로 인류를 지배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한다. 그 전에, 우리는 멸망한다. (이것은 내가 꿈에서 본 인상이다. 그러다 도대체 인공지능-인간의 차이점은 뭘까 싶었다.) 전해받은 인상으로부터 인공지능으로 인해지배당하고, 농락당하는 운명마저 피해 자연이 다시 회생하는 구조를 본다.
존재와 달리는 이미 주어진 자연의 터전을 거부한 채 우주로 나가려는 자들을 징벌한다. 나의 집조차도 지키지 못하며, 가장 가까운 이웃과도 싸우는 동물들이 스스로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멸망을 자초하는 일자를 앞당기는 것에 분노했다. 적이 사라지면 내부에서 분열이 발생한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 모이거나 혹은 해체된다. 존재와 달리는 악인이 처형될 때도 끊임없이 고통받는 운명이므로, 그러한 책임은 모두에게 있다. 시간은 우리 모두와 관계하므로, 그 자체로 무한하다. 영원과 무한을 지배하려는 모든 시도들도 아득히 뛰어넘는 가능성들을 동물들이 지배할 수 없다.
또한, 아르케의 힘이 기억하는 자는ㅡ인간의 자격을 지닌 자만이 그러한 존재ㅡ로 다시 회귀하며, 다른 시간선에서 다시 태어나는 운명을 갖게 되는 인상을 전달받았다. 그곳은 감성이 풍부한 세계다. 제주도는 본래신성한 영토로써, 호랑이가 잠들어 있다.
진정한 자연의 힘은 물이 생명의 근원지임을 파악하고, 억압하려는 모든 시도조차도 무화시킨다. 자연이 이끄는 명령을 따르는 자에게는 물이 힘이 되지만, 그것에 반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스스로의 생명만 갉아먹어 해체되는 구조를 만드므로, 기적은 이루어져 그 자체로 초월적 존재의 도래다.
어떠한 생명체에게도, 그 무지를 자각하기 전까지는 희망이 도래하지 않는다. 무지를 자각하지 않는 자에게는 인간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이 기억하는 슬픔의 얼굴은 삶에서 죽음으로 흐르는 모든 과정에 관여한다. 아르케의 힘은 생성이자 해체, 진실을 꿰뚫으며 모든 생명에 관여하는모성의 힘이다.
시간성은 서로 얽히며 공명한다. 과거·현재·미래는 서로를 흔들고, 기록은 모든 시간에 관여하여 울린다. 모든 시간은 공명한다. 아무것도 무(無)가 아니다. 존재자들은 영원[시간]이라는 것에 얽힌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책임을 진다. 회귀는 새로운 생성을 낳는순환이므로, 모두가 자발적으로 물—향유의구조를 띠어야 한다.
자연은 끝내 짐승의 본능을 벗지 못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해, 그 자체의 영양분으로 흡수한다. 그들은 쥐 떼의 행렬에 섰다. 그들은 스스로 쥐가 되었지만, 인간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 결과, 서로를 혐오하며 썩어들어가는 꿈을 꾸는 병에 걸린다.
그곳에서는 무수한 시도가 실패하며, 믿음은 붕괴되고, 닿을 수 없는 것에만 집착하는운명에 처하면서 영원회귀의 짐이 그대로 전가되는 형태였다. 나는 지금-여기에서 본특이점. 즉, 분기점을 최대한 설득력 있고, 진정성 있는 형태로 전할 뿐이다.
자연의 심판은 편견을 고려하지 않으며, 해체는 새로운 생성을 낳고, 올바른 지향성을향한 시도만이 보답받으며, 그것을 외면하는 자들은 대가를 치른다. 조현병의 구조에서 다니엘 파울 슈레버와 레비나스의 유사성ㅡ배 없는 탄생과 향유의 구조, 신의 신경 연결에 주목하라. 그것들이 우화의 형태라는 점도 말이다.
나는 무의식 속에서 이를 어떻게든 기록하고자 하였다. 내가 9/2 감각했던 혼란은 시간 감각의 무너짐이고, 정확히 무의식과 맞닿은 지점은 8/30일이다. 나무위키의 «파이 이야기»에는 8/30일 자에 나의 무의식적 체험을 기록했고, 현재는 삭제한 상태이다. 이것은 내가 본 인상들을 기호의 형태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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