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것들
※ 본 글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 독해 시도입니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해석은 정통 학술적 견해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필자의 사유 흐름과 해석적 재구성을 포함합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그린비, 문성원, 초판 2쇄 20240411
철학은 존재의 발견이며, 존재의 존재성은 진리이고 철학이다. 존재의 존재성은 시간의 시간화다. 즉 동일적인 것의 효소이고 동일적인 것의 재포착 또는 상기이며, 알아차림의 통일성이다.
철학의 의무는 존재-존재하지 않음의 이분법적 구분을 명확히 밝히지 않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다(아주 명확하게, 선명하게 드러나되, 그것을 의심하지는 않는 모호함). 존재성은 ‘그냥 있는 것’을 드러낸다. 즉, 그것은 눈물로도 웃게 하고, 웃음으로 울게 한다.
참고
철학이나 예술이나 생명이나 운명이나 결국 모든 기준은 모호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떠한 것도, 나머지 반대편 대립항이 없으면 구분조차 못하도록 떠나버리고 말 것이니까. 우리는 나의 적마저도 사랑해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꼴에 놓인다.
영원히 잊어버리고 말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무엇을 참고해서 차이를 비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그것을 누군가는 웃으면서 남기고, 누군가는 순응하면서 에너지를 키우고, 누군가는 반항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철학의 역할은 이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설령, 그것의 이름이 바뀌어도.
존재성은 원래 고체의 모서리를 가리키지 않으며 빛이 반짝이는 동작에서 보이는 움직이는 선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존재성은 어떤 변질이나 이행도 없는 "변양" [양태화](modification)을 가리킨다.
존재성이란 고체의 모서리, 하여튼 온갖 수치나 예측을 다 피하고도 누군가 그것을 피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순간 스스로 드러나는 바람에 사건의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 변양은 모든 질적 규정으로부터 독립적이며, 조용한 밤에 가구가 재료의 무게를 못 이겨 뼈꺽거리는 소리로 그 변화를 드러내는 것과 같은 사물들의 말 없는 마모보다도 더 형식적이다.
이러한 변양[무언가의 변화]은 모든 질적 규정으로부터 독립적이므로, 조용함이 드러나는 곳에서도 삐그럽게 춤추면서 스스로를 알리는 것보다 더 형식적이다.
존재의 존재성은 비유동적인 것의 이 유동성을, 동일적인 것의 이 다양성을, 점적인 것의 이 효소를, 이 경과를 일컫는다. 이것을 우리는 때로 열림이라고 부른다. 존재의 작업-존재성-시간-시간의 경과는 현시이고 진리이며 철학이다.
어떤 것이든 생산자나 경험자, 즉 최초의 발언자보다 깊은 지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변양이 바로 동일자에 대한 동일자의 가시성이기 때문이다. 변양의 형태를 알리는 게 ‘열림’이다. 모든 지각, 장막을 벗기는 모든 행동들의 빛은 존재성에 빚지고 있는 셈이며, 또 철학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동일적인 것이 그-자신에 대해 갖는 간극에 의한 시간성은 존재성이며 본래적인 빛이다. 존재성의 시간은 앎의 세 계기들을 결합한다. 물론 존재성의 빛은 주제가 될 수도, 존재성은 드러날 수도, 말해지고 기술될 수도 있다.
동일한 것들끼리도 보여서 자신에 대해 갖게 되는 상대편을 인정하고,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임을 터득하게 한다. 그리하여 존재성들의 시간은 진정한 ‘앎’을 선물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빛은 자신을 제시한다. 주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울려 퍼지는 것이다. 그 영역의 독특한 울림을, 침묵의 울림을 "듣는 눈"에 대해 울려 퍼지는 것이다.
빛은 자신을 드러낸다. 주제적으로 언급되는 빛이 아니라, 울려 퍼지는 곳이다. 그 독특함을, 입을 열게 하는 침묵을, 웃음을 넘는 울음을, 정상과 비정상을 넘어서는 구분을. 문학이 철학과 결합할 때 철학을 알리고, 철학이 문학을 집어삼킬 때 문학을 알리는 필요성을 전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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