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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영원회귀와 반항

시간의 무게, 아르케의 힘

by 하진

※ 본 글은 알베르 카뮈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 독해 시도입니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해석은 정통 학술적 견해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필자의 사유 흐름과 해석적 재구성을 포함합니다.

ⓒ Pixabay

나는 우상을 믿었고, 그때까지 믿어왔던 모든 것을 버렸다. 구세주인 그는 힘이요 권능이었다. 그를 파괴할 수는 있을망정, 다른 신에게 개종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찬양하라, 그는 주인이며 유일한 왕이시니.


자유를 보장하지 않은 채, 힘과 권능만을 강요한 구세주는 결국 구원을 배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새로운 구세주에게 복종하겠다. 찬양하라, 그는 주인이며 유일한 왕이시니.


참고

내가 보기에 카뮈는 그저 자유를 추구했으며, 옳지 않은 행동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다른 구세주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윤리는 자유와 분리될 수 없다. 행복하려면 자유가 필요하고 윤리적이려면 행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행복도 윤리도 성립할 수 없다.


간악함이야말로 일월같이 뚜렷한 속성, 세상에 선한 주인이란 없는 법이다. 나는 그에게 마음을 바치며 그의 악의에 찬 질서를인정하고, 그 속에 담긴 세상의 간악한 원리를 찬양한 것이었다.


간악함ㅡ선과 악의 애매모호한 구분ㅡ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이고, 절대 선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면, 나는 기꺼이 스스로 총구가 되는 길을 택한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위해 세상의 간악한 원리를 찬양할 것이다.


참고

무신론자인 카뮈는 선과 자유, 반항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으나 그것이 보장되지 않으면 차라리 스스로 악인을 자처하겠다고 주장하는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그가 바라는 가치(자유가 보장되고 억압받지 않는 공간)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이 총구를 겨누겠다고 한다.


나는 나의 새로운 신앙을, 나의 참다운 주인을, 폭군 같은 신을 구해내겠다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배반하겠다고 그에게 맹세했다. 이제 더위가 조금씩 수그러들고,바위도 이젠 진동하지 않는다.


나는 나만의 새로운 신앙을 세우고 나의 폭군 같은 신을 구해내겠다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에게 맹세했다.


해석

여기서 ‘새로운 신앙’은 그것이 설령 기존 왕을 배반하는 행위일지라도 기꺼이 대가를 감수하겠다는 뜻이며, 이로써 카뮈의 강한 반항적 기질과 스스로 추구하는 자유를 위해 행동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난다. 사르트르와 카뮈 같은 대문호들은 흡연을 자유와 저항, 예술적 영감의 상징으로 여겼다.


인간은 시간과 물의 중력을 따라 필연적으로 추락한다. 우리는 모두 영원히 방향을 바꾸지 못한 채 시간과 물의 강 속에 실려 가고 있다. 물의 흐름은 인간의 조건이다. 물은 눈에 보이는 시간의 살이며 힘이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시간과 물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여기서 물의 흐름은 인간의 조건이자 눈에 보이는 시간의 얽힘이며, 동시에 힘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참고

이전에 레비나스의 사유를 바탕으로 아르케, 물의 중요성을 살펴본 적이 있다. “신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세계는 자연적 법칙에 따라 결국 비슷한 성질끼리 결합한다. 돼지는 돼지끼리, 새는 새끼리 모여드는 것처럼, 인간도 친구나 종족을 따라 끼리끼리 모여드는 구조인 것이다.


중력의 원칙에만 복종하는 시간과 물의 강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익사하는 사람과 헤엄치는 사람이 서로 다른 운명을 찾아 헤어지는 장소가 여기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드러날 것이다.


시간과 물은 피할 수 없는 법칙에 따라 흐르지만 그 안에서 어떤 태도와 길을 선택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으며, 그 선택이 결국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참고

우리가 영원회귀의 운명에 갇혀 있고 시간이 무한하다면 결국 언젠가는 물에 잠기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여기서 카뮈의 논리는 모순의 공존을 전제하지만, 논리적 허점은 없다. 심판이 자연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자유로운 주체성을 지니고 올바른 지향성을 향하는 자들은 결국 자신과 비슷한 성질로 회귀하게 되며, 이는 구원자가 있든 없든 동일하게 성립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는 곳은 희망도 윤리도 잃은 곳이고, 생명을 돌볼 힘이 없다. 따라서 자연의 재생적 구조는 그들을 돕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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