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지지 않아도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
※ 본 글은 레비나스의 사유를 바탕으로, 독해를 시도한 글입니다. 정통 학술 해석과는 다소 결이 다를 수 있으며, 개인의 사유 흐름에 따른 재조명임을 밝혀둡니다.
달리 존재함
앞으로 나는 이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싶다. 이는 ‘이해되지 않음’, ‘합리적이지 않음’, ‘공통되지 않음’을 바로 그 이유로 존재의 바깥으로 추방하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존재로 승인하는 용어다. 가령, 나한테 보이지 않는 형체를 남이 본다면, 그것은 달리 존재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그린비, 문성원, 초판 2쇄 20240411
시간화는 진술 속에서 존재성으로서 울린다. 말해진 것으로서의 언어는 그러므로 단일체들을 동일화하는 이름들의 체계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또 그래서 존재자들을 이중화하는 기호들의 체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실체적인 것으로부터 도출된 담론의 다른 부분들을 통해, (...) 요컨대 지시적인 기호들의 체계로 말이다.
시간화는 ‘진술(dire)’ 속에서 존재성으로서 울린다. 그러나 ‘말해진 것(le dit)’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름을 부여받고, 지시되고, 고정된 실체로 동일화된다. 말은 곧잘 “이것은 탁자다”와 같은 식으로 단일체를 명명하며, 눈에 보이는 실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구성하려 든다. 그렇게 언어는 실체로부터 파생된 모든 관계, 사건, 의미들을 지시적 기호체계로 환원시킨다.
참고
진술은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의 말이 아니라,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겪었다”처럼 존재의 변화와 리듬을 담고 있는 이야기다. 존재는 그 안에서 시간을 경험하며,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 자신을 열어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레비나스는 이러한 진술조차 말해지는 순간 다시금 지시적 기호가 된다는 사실을 경계했다.
그에 따르면, 말해진 것(즉, 고정된 의미를 지닌ㅡ 가령 개념)은 진실을 드러내기보다는 그것을 고정된 의미로 닫아버린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언표적 구조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는 시간 속에서 드러난다”는 구조에 반하여, 존재는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진술(dire)의 울림을 통해 시간화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언어는 술어 명제에서는 동사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히 그럴 만하다. 술어 명제에서 실체들은 존재의 양태들로, 시간화의 양태들로 해체되지만, 여기서 언어는 존재자들의 존재를 이중화하지 않는다. 여기서 언어는 존재성의 말 없는 울림을 드러낸다.
하지만 언어는 술어명제 속에서는 동사가 된다. 예컨대 ‘이 사과는 빨갛다’, ‘너는 아파 보인다’와 같은 문장은, 주어(사과, 너)를 고정된 실체로 동일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열어 놓는 구조다. 이때 언어는 존재자의 본질을 정의하거나 고정하지 않는다.
동일한 단일체들ㅡ사물들의 성질ㅡ이 술어 명제 속에서 그것들의 존재성으로 울리게 되는 것은 감각의 실체성과 시간성에 대한 심리적 반성을 좇아서가 아니라, 탁월한 의미의 현시인 예술로부터다. 모든 예술이 먹고사는 새로운 형식들에 대한 탐구는 실체적인 것으로 다시 떨어지려 하는 동사들이 어디서나 깨어 있게 한다.
동일한 단일체들이 존재성으로서 울리게 되는 계기는, 감각의 실체성이나 시간에 대한 심리적 반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탁월한 의미의 현시로서의 예술에서 비롯된다. 예술은 늘 실체화되려는 언어, 고정하려는 동사적 구조를 끊임없이 깨운다. 다양한 감각과 관점이 공존하므로, 동일성으로 귀결되지 않으면서도 존재를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참고
과학주의적, 실체주의적 사고에 대한 반발이면서도, 이것 또한 하이데거의 사유인 ‘존재는 시간 속에서의 자기반성으로 드러난다’는 존재-시간의 구조를 전복하려는 시도다. 예술은 의미가 확정되기 직전의 불안정성을 유지하며, 우리가 언어로 고정하려는 실체를 언제나 ‘흔들리게’ 한다.
가령, 모나리자는 수많은 해석으로 접근하더라도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예술은 동사화된 존재, 즉 관계 속에서 열려 있는 존재를 다시금 현전 하게 만든다. 참고로,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살(le chair) 개념도 세잔의 회화ㅡ즉, 예술 작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림에서 빨강은 빨간색을 띠며 녹색은 녹색을 띤다. 형태들은 윤곽들로서 생산되며, 형태들의 비어 있음에 따라 비워진다. 음악에서는 음들이 울리고, 시에서는 말해진 것의 재료인 어휘들이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이 환기하는 것 앞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그들의 환기하는 힘으로, 또 환기하는 그들의 방식으로, 그들의 어원으로 노래한다.
그림에서 빨강은 빨강으로서 울리고, 녹색은 그 고유한 방식으로 빛난다. 형태는 윤곽 속에서 생산되며, 그 윤곽의 비어 있음에 따라 스스로를 비운다. 음악은 음 자체로 울리고, 시는 어휘들이 그들의 어원과 환기력, 그리고 지워지지 않은 잔향 속에서 노래한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진리와 오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또 배반이 충실성에 대한 위반인 것은 오직 존재의 질서에서다. 존재의 이편 또는 너머ㅡ이것은 존재의 이편의 또는 너머의 존재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자들의 존재보다 더 참되거나 더 진정한 존재의 실행ㅡ존재성ㅡ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진리와 오류, 충실함과 배반이라는 말들이 의미를 갖는 건 오직 ‘존재의 질서’ 안에서만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는 모든 기준은, 이미 ‘존재’라는 구조 안에서 성립된 규칙들에 불과하다. ‘존재 너머’는, 어떤 또 다른 존재자나 더 높은 차원의 실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자의 존재보다 더 본질적인 무엇, 더 깊은 존재성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Point
- 존재성은 기호화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고, 예술처럼 열린 방식으로 도래한다.
- 옳음/틀림의 구분법조차도 존재의 질서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예술은 즉각적으로 완성되며, 계속 새로 태어날 필요가 있다는 믿음은 그저 편견일 뿐이다. 예술 작품 역시 하나의 구성물이며, 위대한 창조자가 얼마나 단조로울 수 있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가와 같은 이유로 예술가는 작품에 자신을 바치며 작품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된다.
-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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