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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운명의 실이 끊기는 순간

끊어진 실과 이어지는 시간

by 하진

※ 본 글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 독해 시도입니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해석은 정통 학술적 견해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필자의 사유 흐름과 해석적 재구성을 포함합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그린비, 문성원, 초판 2쇄 20240411

ⓒ Alexander Rothaug, The Three Fates. Public Domain.


명제들로 언표될 때, 형언 불가능한 것(an archique)은 형식 논리의 형식들과 짝을 이루고, 존재 너머는 존재와 존재자의 모호함 속에서 깜박인다. 존재자가 존재를 은폐해 버릴 그런 모호함 속에서 말이다.


참과 거짓으로 구분되는 명제는 형언 불가능한 차원조차도 논리의 형식에 억지로 맞춘다. 그 결과, 존재를 넘어서는 가능성들은 서서히 잊힌다. 존재자의 개별 속성·기능·가치에 매몰된 일상성이, 정작 그 존재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참고

서구 형이상학은 법칙과 최초 원인(archē)을 통해 세계를 총괄하려 했다. 레비나스는 이 전통을 뒤집어, 형언 불가능한 것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개념화되는 순간, 대상화·전체화되어 사라지는 차원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사랑한다”는 두 음절을 내뱉는 순간이 곧 ‘형언 불가능한 것’이다.


입 밖으로 나온 그 소리는 단 한 곳에도 정착할 수 없다. 실수를 가볍게 넘기려는 능청스러운 농담, 엄마 품을 찾는 아이의 애원, 스타를 향한 팬들의 환호, 연인 사이를 건너가는 맹세… 발화는 언제나 갓 불붙은 불꽃처럼 의미를 바꿔 타오르고, 개념의 틀 안에가둘 수 없는 무-기원적 틈으로 남는다.


한편, ‘존재자가 존재를 은폐한다’는 망치 사례로 자주 설명된다. 테이블 위의 망치를 보면, 우리는 그것을 ‘못을 박는 도구’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 전에 누군가가 망치를 제작했고, 누군가가 이 자리에 가져다놓았다는 사실은 망치의 용도에 가려질 것이다. 기능적 의미의 가려짐에 그저 ‘있음’이 된다.


예시

명제가 고정되는 순간, 타자는 동일성 속으로 환원돼 주체의 체계에 봉사한다. 명제는 정답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고, 옳음과 그름의 이분법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가령, 시험에서 문제를 예측하고 그에 맞는 정답을 제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세상은 옳고 그름으로 가를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쁘다”라는 명제조차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무고한 이를 살해하는 행위는 명백한 범죄다. 그러나 범죄자를 제압하다가 발생한 죽음, 오랫동안 감금·폭행당한 피해자가 가해자를 죽인 사건 앞에서 ‘살인은 무조건 악이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존재와 달리는 말함 속에서 언표되지만, 그말함은 또한 취소되어야 한다. 존재와 달리를 말해진 것에서 떼어 내기 위해서다. 말해진 것에서 존재와 달리는 이미 달리 존재함만을 의미하게 된다.


존재 너머는 말함 속에서 표현되나, 동시에 그 말함조차 취소되어야 한다. 말해지는 과정에서의 울림은 사라지고, 그 울림의 여운만이 머물기 때문이다.


철학이 언표하는 존재 너머-그런데 철학이 이것을 언표하는 것은 그 너머의 초월성 자체 때문이다-는 어쩔 수 없이, 시중드는 언표의 형식들로 떨어지고 마는가? 이 말함과 이 취소함은 모아질 수 있는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철학이 찾는 존재-너머.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 순간, 그 너머는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초월의 가능성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개념에 종속되고 마는가? 말함과 말해진 것은, 울림의 여운—말해진 흔적ㅡ으로 공존할 수 있는가?


존재와 달리. 관건은 존재성에서 군림하는 운명의 파열을 언표하는 일이다. 파르카이에 의해 잘려진 실 끝이 이후에 다시 연결되는 것처럼, 존재성의 부분들과 양태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다. 즉, 동일한 질서를, 그러니까 질서를 벗어나지 못한다.


존재 너머를 찾는 것. 관건은 전체성에서 군림한 ‘운명의 파열’을 언표하는 일이다. 운명의 여신이 준 죽음이 이후에 다시 연결되듯이, 달리 존재하는 특성과 양태들은 제각기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다. 모두가 동일한 질서의 경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참고

전체성ㅡ모든 것을 하나의 틀로 흡수하려는 힘ㅡ안에 머문다는 것은 곧 보편성과 동일한 질서에 속한다는 뜻이다. 그곳에서는 존재 너머를 볼 수 없다. 이는 레비나스가 서로 다른 개체를 하나로 묶는 전체성의 폭력을 비판한 맥락과 맞닿아 있다. 운명의 파열은 전체성을 벗어나는 순간, 죽음의 운명조차 이겨내는 가능성이다.


여기서, ‘파르카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세 여신이다. 한 여신은 실을 끊어 인간에게 죽음을 선언하는데, 레비나스는 이러한 죽음의 운명조차 거스르는 힘을 타자로부터 발견한다. 또한, 죽음은 종착역처럼 보이지만, 그 끝이 끝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타자의 시간 속에서 죽음은 여전히 연결된다. 가령, 언어와 작품, 발명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다시 만난다.


중요한 것은 자유를 넘어서려는 시도다. 전쟁과 물질의 결정론에 대한 중단인 자유는 여전히 존재성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고 시간 속에 또 역사 속에 자리한다. 역사는 사건들을 서사시(épos)로 모아 공시화하며 그것들의 내재성과 질서를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자유ㅡ전쟁이나 물질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힘ㅡ를 넘어서려는 시도다. 전쟁이나 물질의 구속을 멈추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는, 그 자체로 ‘운명’이라는 더 큰 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역사는 그 모든 사건을 다시 이야기ㅡ서사적 총서ㅡ로 묶어버린다.


참고

자유를 강물 위에서 노를 젓는 배에 비유한다면, 강(=존재성)의 흐름 자체를 벗어날 수는 없다. 배는 그 강의 질서와 흐름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 강 위에서 있었던 모든 항해를 모아서, 한편의 항해 연대기처럼 기록한다. 그 연대기 속에서는 각 배들의 여정이 질서와 의미를 가진 것처럼 묘사될 것이다.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선, 먼저 강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존재성에서 빠져나옴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어디로 가기 위해 그렇게 하는가? 어떤 영역으로 가기 위해? 어떤 존재론적 평면에 놓이기 위해? 그러나 존재성에서 빠져나옴은 어디로라는 질문의 무조건적 특권에 이의를 제기한다.


중요한 것은 존재성이라는 틀을 벗어나는 그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다만, 그 벗어남이 ‘어디로’ 가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목적지’를 전제로 하지 않고, ‘어디로 간다’는 생각 자체를 의심한다.


그것은 비-장소를 의미한다. 존재성은 모든예-외를, 즉 부정성, 무화, 그리고 이미 플라톤 이래로 "어떤 의미로는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져 온 비-존재를 다시 덮어 버리고 회수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우리가 보여줘야 할 점은, "존재의 타자"라는 이 예외가 존재하지-않음을 넘어서 주체성 또는 인간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존재성에서 벗어나는 목적지는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라, 비-장소다. 존재성은 벗어나려는 모든 시도를 다시 제 안으로 끌어들이므로, 결국 존재하는 것의 일부로 다시 규정될 것이다.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존재의 타자”는 예외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넘어서는 주체성이나 인간성을 의미한다는것이다.


나는 유일성으로서, 비교 바깥에, 공동체 바깥에, 유와 형식의 공동체 바깥에 있기에, 자기 안에서 결코 쉴 수 없으며, 평온할 수없고, 자기와 합치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한데 잠그려는 존재성의 물살. 그흐름을 거슬러 서 있는 ‘자기-자신’이 곧 예외다.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단독자는, 동일성 밖의 가장자리에 몸을 기댄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도 편히 쉴 수 없고, 끝내 자신과도 포개지지 않는 존재가 된다.



Point

- 존재성은 곧 전체성이 되어, 타자와 예외를 동일성 속에 흡수하려 한다.

- 말해지는 순간 지워지는 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있다.

- 명제는 단 하나의 정답을 요구하지만, 삶은 늘 여백에서 결정된다.


과학이 제시하는 단 하나의 결론보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무수한 가능성을 더 믿는다. 내게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결이 천을 이루듯 겹쳐진다. 그렇다면 ‘지금’이라고 부르는 순간 역시, 다른 시간의 결들과 쉼 없이 교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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