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현적 나르시스트에 대한 생각
나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주체들을 단일한 원인—예컨대 뇌과학적 요인—으로만 설명하고 싶지 않다. 또한 그들을 ‘비정상’이라 낙인찍어 배제하거나, 유전자 개입과 같은 방식으로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일에 대해서도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인간의 다양성은 종(種)이 생존을 이어가는 중요한 기반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개인적 가설에 기반한다. 나르시스트로부터 반복적 착취나 조작을 경험한 경우, 무엇보다 경계를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이 글의 목적은 결코 그들을 미화하는 데 있지 않다. 다만, 그러한 주체를 어떻게든 이해의 대상으로 맞이하는 것,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있다.
우리는 흔히 고집이 세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나르시스트’라 부른다. 언뜻 보기에 그들은 자아가 강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로 본다. 그들의 내면은 오히려 취약하다. 그들은 자기 주관 없이 타인의 생각에 기대어 살아가며, 그 내면의 목소리는 대부분 사회나 부모가 부여한 초자아의 강박에서 비롯된다.
자아가 약하다는 것은, 자신의 내적 기준보다 타인의 평가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평가에 따라 스스로의 가치를 규정한다는 뜻이다. 마치 자신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대신, 다른 사람의 눈동자 속에서 비친 모습을 확인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그렇게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남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아가 약하다는 것인가?” 그러나 정작 자아가 강한 사람은 제멋대로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욕망과 한계를 명확히 자각하고, 그것을 사회적 규범과 어떻게 조율할지 스스로 결정한다.
철학자는 좋은 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다수의 통념에 맞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도시국가의 규범—즉 초자아—에 복종하기보다, 자신의 다이몬—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했다. 끝내 자발적으로 사형을 받아들이며, 타인의 시선이 아닌 스스로의 원칙을 지킨 것이다.
반면, 나르시스트는 겉으로는 외부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 평가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다. 그들의 ‘자기중심성’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승인받은 이상적인 자아상을 연기하기 위한 강박적 순응에서 비롯된다. 가령, 권력·지성·이상적 사랑에 대한 공상이 대표적이다.
결국 제멋대로 구는 것처럼 보여도, 그 행동은 외부가 요구하는 역할을 재현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의견이 존중받는 환경, 무엇을 원하는지 성찰할 기회, 그리고 ‘사회적 규범은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다’라는 인식이다. 또한, 사람은 스스로 부딪히고 깨달아야만 진짜 자아를 세울 수 있다.
나르시스트의 내면은 공허하다. 타인을 밀고, 높은 자리에 올라도, 결국 타인의 인정이 끊기면 ‘나’도 꺼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주 쓰는 방어는 투사다.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결핍과 불안을 타인에게서 “발견된 문제”로 뒤집어 씌우고, 그 결함을 공격해 자기 정당성을 회수한다.
여기에 이상화–평가절하, 분열, 과잉 통제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 자아상은 손바닥 위의 유리컵처럼 불안정하다. 한 번 흔들리면 산산이 갈릴 것 같은 붕괴 불안이 즉시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르시스트에게 상처받은 이들은 종종 그들이 업보를 짊어지길 바라며 저주를 퍼붓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형벌 속에 산다. 삶은 껍데기뿐이고, 속은 비어 있다. 가짜 얼굴을 갈아 끼우며 버티지만, 가짜임을 인정하는 순간 무너질 것을 알기에 끝내 직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들이 이 방식으로만 살아야 했던 것은 아니다.
아기는 본래 ‘나는 특별하다’고 믿으며 태어나지만, 성장 과정에서 ‘특별하지 않아도 안전하다’는 무조건성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 배움이 실패하면, 사람은 세계를 억지로라도 안정된 것처럼 느끼려 한다. 그 왜곡된 방식이 드러나는 전형적인 반응 중 하나가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① 연인관계
연인에게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혼자 시간을 좀 갖고 싶어”라는 메시지가 온다. 나르시스트는 이를 곧장 ‘버림받는다’는 말로 번역한다(투사). 머릿속에서 상대를 이기적이고 냉정한 사람으로 재구성한다(평가절하). 불안이 고조되기 전에 먼저 연락을 끊거나, 공격적인 말을 던진다.
② 가족관계
명절에 부모가 “이번엔 조카 선물부터 챙기자”고 말한다. 나르시스트는 ‘내가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인다(투사). 곧바로 부모를 편애하는 사람, 혹은 자신을 폄하하는 존재로 규정한다(평가절하). 속으로 “역시 이 집안은 날 인정하지 않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참고
나르시스트가 거절이나 비판에 특히 취약한 이유는 그것이 곧바로 과거의 상실 경험과 결핍된 애착 기억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버림받을 거야”라는 불안은 상대방의 의도로 둔갑하지만, 결코 “내가 불안해서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문제의 중심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이는 관계에서 취약한 위치에 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적 자아상과 충돌한다. 결국 균열을 피하기 위해 불안을 외부로 돌리고, “넌 이기적이야” 혹은 “넌 날 무시했어”와 같은 비난이나 투사로 변형해 나타낸다.
나르시스트가 변화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행동과 내면을 가감 없이 직면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평생 의지해 온 사고의 기둥을 뿌리째 뽑는 일이다. 곧, 자신이 믿어온 세계를 부정하는 동시에 ‘나’라는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이 된다.
세계가 본래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존재론적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부조리와의 대면은 고통스럽지만, 초자아가 강하게 내면화된 이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이다. 초자아는 질서와 안전을 보장하는 ‘마지막 방어선’이기에, 그 균열은 곧 무방비 상태로의 추락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약한 자아와 과도하게 내면화된 초자아의 결합은 최악의 조합이 된다. 그들은 이드를 좇아 충동적으로 살 수도 없고, 규범에 온전히 의탁할 수도 없다. 충동적인 삶은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더라도 최소한 ‘나의 욕망’이라는 자율성을 담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르시스트는 욕망도 규범도 붙들지 못한 채, 양쪽에서 동시에 끌어당기는 모순 속에 갇힌다. 그 안에서 자아는 점점 약해지고, 억눌린 이드는 다른 형태로 귀환한다. 결과적으로 탄생하는 것은 불안정한 세계를 버티려는 ‘극단적 자기 구조화’다.
이 지점에서 나는 조현병과 나르시시즘이 공유하는 한 가지를 떠올린다. 그것은 ‘망상’이다. 세계의 부조리와 균열, 혹은 실재의 침입 앞에서 정신은 절대적 질서를 다시 세우려 한다. 그러나 자아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때, 그 질서는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못한 채 폐쇄적인 구조로 굳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만이 신에게 선택 받았다”라는 믿음이 그렇다. 이는 자신을 무력한 위치에서 구해내고, 절대적 타자인 신을 통해 세계의 안정감을 회복시킨다. 내가 비판하려는 것은 초월의 유무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독점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에 있다.
모든 타자를 배제한 채, 오직 ‘나만이’ 그 초월의 대상이라는 과대망상적 구조가 형성될 때, 그것은 폐쇄적 자기확증 장치로 변질된다. 이때 나타나는 수동성은, 나르시시즘과 조현병적 망상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자기중심적 세계 구성과 깊은 유사성을 드러낸다.
나르시스트는 성인이 된 이후에는 변화 가능성이 낮아, 현실적으로는 거리를 두는 것이 최선일 때가 많다. 다만 이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가능성을 끝까지 탐색해 보려는 시도다. 냉정히 말하면, 성찰이 가능한 인간은 이미 변화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구조를 고착화시킨 것은 개인의 선택만이 아니다. 근대적 문화, 특히 이성 중심주의의 절대화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성은 타인의 고통이나 부조리를 인정하기보다, 질서와 통제의 유지를 우선시한다. 그 결과, 개인이 감당해야 할 불안과 혼란은 사유나 대화를 통해 풀릴 기회를 잃는다.
불안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내면 깊숙이 봉인되고, 결국 왜곡된 방식으로 터져 나온다. 집단주의 문화는 이를 더욱 강화한다. 다수의 규범에서 벗어나 자기 기준을 따르는 사람에 대한 수용이 부족한 환경에서, 진짜 자아—욕망을 인식하고 그것을 사회와 타협할 수 있는 능력—는 평가받지 못한다.
대신, 초자아에 종속된 자기중심성만이 부각되는 역설이 생겨난다. 그러나 봉인된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그것은 뒤틀린 형태로 폭발하고, 사회는 이를 ‘병리’로 규정하고 재격리한다. 이렇게 해서 [내면의 붕괴 → 왜곡된 표출 → 병리적 낙인 → 재격리] 라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근본적인 원인을 치유하기보다, 약물로 증상을 잠재우고 격리로 ‘거짓된 평온’을 유지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평온은 불편함까지 덮어버린 채, 문제를 더 깊숙이 숨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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