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가장한 가능성들의 서열
“창조적 발상”, “이성적 사고”, “망상”의 경계는 사실 불분명하다. 우리가 붙잡는 수많은 기호들은 상징계가 붙여준 이름일 뿐, 본래는 모두 무의식이 흘려보낸 흔적이다. 가령 어떤 꽃이 이름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본래 꽃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꽃이라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세계는 늘 주체의 욕망을 닮은 방식으로만 이해된다. 우리는 꿈은 허구이고 현실은 깨어 있는 삶이라는 단순한 이분법 속에 머물며, 무의식의 속삭임은 흘려보낸다. 뇌는 언제나 주체를 보호하려 작동하고, 우리는 편안한 해석 쪽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욕망은 필연적으로 투영된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질서가 흔들릴 때, 우리는 그 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철학자들이 응시한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니체는 영원회귀라는 무한 반복 속에서 새로운 힘을, 카뮈는 끝없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올려야하는 시지프의 모습에서 긍정의 힘을, 레비나스는 타자의 도래 속에서 시간의 전환을 포착했다.
또한, 그들은 각 시대마다 진실을 가리고 있던 장막을 걷어내고자 했다. 니체에게 그것은 노예도덕을 정당화하는 절대 권위였고, 카뮈에게는 종교적 위안 뒤에 봉합된 부조리였으며, 레비나스에게는 존재의 질서 그 자체였다. 오늘날에는 ‘정상성’과 ‘보편성’이 이런 빈틈을 메운다.
그러나 질서가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질문 앞에 선다. 그때 필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검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선과 가능성을 어떻게 공존시킬 것인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세계를 바다에 비유해보자. 우리는 그 안을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 낚싯바늘에 걸려 잠시 수면 위로 올랐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온 물고기는 자신의 경험을 어떠한 단어로도 완벽히 번역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은 어떤 흔적으로 남아 다른 방식으로 발현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상성이라는 이름으로 가능성을 쉽게 지워버린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결국 희망이라는 가능성까지 스스로 닫아버리게 된다. 중요한 것은 같은 바다를 헤엄치면서도, 서로를 의심하거나 내치지 않는 일이다.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이들의 흔적을 끝내 지워버리지 않는 태도인 것이다.
인간의 모든 신념은 결국 미지 위에 세워진다.
우리가 다투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다만, 진실을 가장한 가능성들의 서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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