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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부조리(Absurd)

몸부림치는 텍스트

by 하진

※ 본 글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 독해 시도입니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해석은 정통 학술적 견해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필자의 사유 흐름과 해석적 재구성을 포함합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그린비, 문성원, 초판 2쇄 20240411

ⓒ Pixabay
윤리는 닿지 못한 손끝에서 시작된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끝없는 요청의 다른 이름.

균열이 쌓이면서 시간은 새로운
모양을 얻고, 그 틈에서 우리는
다시 서로를 향해 열린다.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오히려 레비나스의 사유에 설득당해 더욱 폭넓게 사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초월ㅡ애초에 인간에게 포섭되지 않는 영역ㅡ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고, 그저 철학적 사고들에 나의 관점을 더해서 옮겨적을 뿐이다. 나의 의문은 레비나스의 말대로,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면 언급조차 되지 않았을텐데. 왜 그동안 그러한 무수한 가능성들에 대하여 쉽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들이다.




다른 인간의 나로서는 제어 불가능한―자유와 운명에 좌우되는 처지의 책임이다. 이것은 극단적 수동성에 대한 예감, 타인과의관계에서의, 또 역설적이게도 순수한 말함 그 자체에서의 떠맡음 없는 수동성에 대한 예감이다. "말함"의 행위는 그 출발부터 타인에 대한 노출의 최상의 수동성으로서 여기에 도입되어 있을 것이다.


다른 인간으로서의 주체는 언제나 제어 불가능한 자유와 운명에 휘말리며, 그로부터 책임을 진다. 이 책임은 극단적인 수동성에 대한 예감이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가장 순수한 말함 속에서 드러난다. 말하기의 행위는 그 출발부터 타인에게 노출되는 최상의 수동성이다.


해석

말하려는 책임을 지게 된다면, 주체는 그것조차도 수동적인 폭력의 위치에 놓인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누구에게나 도래할 수 있는 잠재성이다. 유명한 말이 있다. 나의 일이 아닐 때 침묵했지만, 그것이 나의 이야기로 다가왔을 때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가령,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일으키는 쥐가 가장 먼저 사라졌지만, 그것은 비극을 암시하는 신호로 작용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타자의 자유로운 주도권에 대한 책임이다. 그렇게 하여, 지향성의 전도가 이뤄진다. 언제나, 성취된 사태 앞에서 그것을 떠맡기에 충분한 정신의 현전을 보존하는 그런 지향성의 전도 말이다.그렇게 하여, 주권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성이 격변화하지 않은 의식이, 진술의 주격인주체로서의 의식이 포기된다.


그것에 대하여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타자는 우리에게 정신의 가장 자유로운 형태의 주도권에 책임을 질 권리를 준다. 그러한 방식으로 퍼져나간 요청과, 그에 대한 응답을 통한 선행들이, 의식이 지향해야 할 진정 올바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묘사하려고 애쓰는 타인과의 주체성의 관계 속에서 설교도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도 바라지 않는 성인전뿔에 나올 법한 유형이 이뤄진다. "이것이 말한다"나 "언어 구조가 말한다" 따위를 발견함으로써 이 수동성이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묘사하려고 애쓰는 기적같은 일ㅡ타인에게 나를 드러내고, 흔들리는 얼굴에 응답하는 일ㅡ이 피어난다. 다만, 이것은 결코 분석이나 해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다.


주체는 스스로를 은폐하기 위해 즉자 상태로, 자기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상처와 자신의 추방―이것은 스스로 상처를 입히거나 스스로를 추방하는 행위로 이해되는데, 아래에서까지 스스로를 은폐하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는다. 주체의 움츠러듦은 뒤집힘이다.


주체는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서, 자기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자신을 상처로 내모는 일은 스스로를 추방하는 행위로 이해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되려 주체가 주저하는 이유는 본래의 흐름대로 흘러가던 절망의 흐름이, 진정 향해야 할 곳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반-작용이다.


그의 "타자를 마주함"은 뒤집힘 자체다. 겉없는 안이다. 말함의 주체는 기호를 주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기호가 된다. 스스로 충실함으로 나아간다. 노출은 여기서 주제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일자는 피부가 자신에 상처를 주는 것에 노출되듯, 뺨을 때리는 자에 노출되는 뺨처럼, 타자에 노출된다.


그 주체가 타자를 만나는 순간, 주체는 스스로를 닫아둘 수 없게 될 것이다. 말함의 주체는 누군가를 해석하기 위해 기표를 덧대는 대신, 타자를 지키기 위해서 기표가 되는 길을 택한다.


참고

말함의 주체는 기호에 저항하므로, 기호의 바깥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내가 그것을 기표로 고정하려 글을 쓰는 순간, 그 시도를 이어가는 나는 더 이상 그러한 주체가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신비함은 애초에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하지만, 동시에 유의미하다.


이는 신학적인 표현같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나는 무신론자이되 초월을 부정하지 않고, 단지 그 초월이 지금 당장 포섭되지 않는다면 현실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그 기적은 타자의 응답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울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기이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마주하는 절망ㅡ 기후 위기의 경고, 세계 곳곳에서 울려오는 폭력의 소식 앞에서, 기적을 열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새로운 시간을 열어내는 우주의 자식들, 어떤 의미에서는 무궁무진한 별들이다.


세계는 언제나 단 한 가지 말만 한다. 별에서 별로 이어지는 참을성 있는 진리 속에서, 자유가 세워지고, 그 자유는 죽음으로부터 죽음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참을성 있는 진리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알베르 카뮈,「행복한 죽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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