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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에서 시작된 문명

by 서원



인류는 불을 발견했고

언어를 만들었고

도시를 세웠다


하지만 그전에

똥부터 가렸다


길가에 아무 데서나 싸던 인간이

구덩이를 파고

담을 세우고

문을 달기 시작하면서


문명은

부끄러움에서 시작됐다


화장실은

인간이 스스로를 감추기로 한 첫 장소였다

짐승은 싸고 나서 냄새로 자기 존재를 남기지만

인간은 싸고 나서 물을 내리고

흔적을 지운다

그게 '문화'다


하수도는 도시를 만든다

수세식은 질서를 만든다

화장실 표지판 젠더를 구분하고

변기 줄 서는 법은 민주주의를 훈련시킨다


그러니 이 모든 질서의 근본은

배설에 있다


문명의 정수는

황금빛 궁전이 아니라

작고 조용한 칸막이 안

그 흰색 도자기 위에서 벌어진다


나는 오늘도

화장실에 앉아

문명의 연장선에 앉아 있다

문을 잠그고 물을 내리고

조용히 생각한다


"나는 인간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

싸고 나서 물을 내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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