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wacheon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을 읽고 나는 경마장에 가고 싶었다. 소설 '경마장 가는 길'에서 경마장은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 속 주인공 J와 R이 심리적 육체적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R이 수첩에 적어내는 메모를 일컬어 '경마장 가는 길'이라고 명명해졌을 뿐이다. 다시 말해 '경마장'은 소설 속에 소설(메모)에서 아주 작은 은유와 상징 내지 거대한 거울 같은 장치적 역할을 부여받은 장소이다.
하수구에 말려들어간 머리카락에 묻은 코딱지만큼이나 더러운 기억들을 아주 집요하게 풀어낸 소설이다. 읽다 보면 '아! 이 소설은 분명 재현된 기억들이야!' 하고 깨닫게 된다. 방대한 페이지수와 희미한 기억을 붙잡고 절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는 화자의 태도는 소설 속 R과 소설가 본인이 동일인물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일지는 '작가의 말'에서 조차 이 소설이 재현인 것인지 허구의 것인지 밝히지 않고(오히려 그 구분을 유치하게 생각해내며)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집요한 하일지의 세계관속에서 J라는 허구이자 실재하는 인물은 도망칠 곳을 못 찾았을 것이다. '무엇'이라고 한다면 '기억'이라 답할 것이고 '어떻게'라고 한다면 '존나게'라고 답하겠지.
J와 R은 가해와 피해/ 가학과 피학이라는 역할을 수행하고 소설과 현실 또한 순서를 반복하며 어디 한 곳 쉴 곳 없이 무한궤도를 그린다. R이 대필해준 J의 소설과 같이, 그 둘이 겪고 있는 불확실성과 같이 소설과 현실은 반대로도 불리어질 수 있다.
그동안 나는 흡사 내가 허구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중략)… 그리고 지금 저기에 술을 마시고 있는 남자들의 동작 하나 하나가 모두 나한테는 허구적으로 보여,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모두 그 원인도 결과도 그리고 의미도 알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지
나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허구의 세계에서 기획되어 있는 행동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나, R이라는 존재는 어느 소설가에 의해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 R이 지금, 너 J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마저도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소설가에 의해 씌어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어
나는 이따끔 내가 날마다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기록해 두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하나의 소설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걸 있는 그대로 기록해 두면 대단히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 되리라고 생각해. 물론 그런 유형의 소설이 나오면 무식한 독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 어느 시대든지 참된 소설의 독자는 언제나 무식하게 마련이지
영화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에서 팽이가 무한정 돌아가던, 멈춰버리던 극장 밖으로 나온 뒤로는 '영화'라는 '대상'을 곱씹을 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끝낸 순간부턴 창작물이라는 허구의 세계 속에 나 자신의 현실이 섞여 들어가 버릴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깐 생각보다 심각하게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헷갈리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기회삼아 경마장에 관한 기억을 나도 자세하게 써보고 싶어졌다.
우리 아버지가 뭘 해보려 해도 아무것도 안되던 시절. 아버지의 욕망과는 상관없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했던 시절. 청와대 정책고문인지 뭔지 어디 가장 끄트머리쯤? 에서 뭐라도 해보려던 시절. 마사회 회장님을 아마도 한 다리 두 다리 건너 알고 지내시던 시절.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경마장에 가셨다. 그 당시 경마장은 구질구질했다. 빗물인지 흙탕물인지가 흘러내린 자욱이 많은 쓰러져가는 건물 하며, 검은 모자를 쓰고 담배 쩐내가 나는 아저씨들의 행렬, 말이 뛰기 시작하면 말보다 더 길길이 날뛰는 아저씨들, 씨발새끼 개새끼 말새끼 저새끼 그새끼 이새끼 씨팔씨팔 우르르 쾅쾅. 추입하는 9번 말에 좌절하던 한 아저씨는 의자 위로 벌떡 일어나 "그래!!! 우리 럭키루키!! 가야지!!! 그렇게 가야지!!!" 소리친다. 경마장 처마 밑에 검은 그림자들이 좋다고 소리치고 싫다고 소리치는 와중에 나와 내 동생은 엄마손을 잡고 잔뜩 긴장해 있었다. "야하!!! 땄다!!! 땄어!!!" 그림자 같은 군중 속에서 모자를 벗고 소리치는 저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였다. 그때서야 나도 모르게 긴장이 좀 풀렸다. 아버지가 기뻐하신다. 쌕쌕 대는 말의 어깨에 아버지의 웃음이 걸렸다. 몇 번 말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2번? 말의 이름은 무엇이었나. 천하통일? 뭐 그런 이름이었나.
기분이 한껏 오른 아버지는 한 번 더 배팅하기 위해 마토를 사러 계단을 내려간다. 아버지의 오른손에는 방금 돈을 딴 마토가 들려있었고 왼손에는 내가 들려있었다. 들썩들썩 내려가니 아까보다 곱절이 많은 검은 군중들이 창궐하고 있다. 줄 같지도 않은 줄을 서고 기다리니 아주머니가 돈을 쥐어주고 다음 경마를 위한 마토를 건넨다. 아버지가 묻는다. "몇 번! 몇 번!? 이번에는 몇 번으로 할까!"
"저는 이번에 5번이 이겼으면 좋겠어요." 왜인지는 모르지만 5번이 좀 불쌍하게 생겼었다. 5번이 이길 것 같아서가 아니라 5번이 이겼으면 해서 5번을 골랐다. 그런 소소하고도 따스한 염원이 있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냐 걔는 비실비실해 걔 안 좋아 딴 애로 골라봐"라고 하셨다. "5번이요..."
이날 아버지가 5번을 고르셨는지, 5번이 멋지게 추입으로 우승을 하진 않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몇 차례 아버지는 돈을 땄다. 그중에 몇 번은 내 동생이 찍은 번호 덕분이었고 몇 번은 나 덕분이었다. 담배연기 자욱한 검은 군중들의 함성 속에서 아버지도 머리를 뜯어가며 기뻐하고 아쉬워했다. 그 열기가 어색했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모종의 따스함을 느꼈었고 모처럼 가족 나들이 같았다.
구정물이 묻은 건물을 우르르 빠져나오며 엄마와 함께 핫도그 하나를 사 먹었다. 내 동생은 뭐가 재밌었는지는 몰라도 굉장히 좋아했다. 엄마도 모처럼 아버지에게 불만이 없어 보이셨다. 아버지가 앞장서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핫도그가 맛있었다. 지친 말들이 좀처럼 푹 쉴 수 있는 날이길 바랬다. 꼴등한 말들이 혼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이런 사소한 걱정들을 뒤로하고 지금의 가족 나들이가 너무 좋았다. 내 기억 속에서 가장 기분 좋은 '주차장 가는 길'. 그때 아버지는 얼마를 쓰고 얼마를 따셨으려나. 집에 돌아가는 자동차에서 혼자 생각했다. 검은 모자를 쓰고 담배를 빡빡 피고 욕을 많이 하는 아저씨들도 다 착한 사람이구나 하고 혼자 생각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경마장에 가 본 적이 없다. 따라서 나는 경마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오래전에 언젠가 한 번은 누가 나에게 경마장에 대해서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누구였는지 지금 알 수 없다. 그가 말한 경마장은 어쩌면 이 도시에 있는 경마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대에 있는 경마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람 부는 오후에 하늘 아득히 떠가고 있는 신문지처럼 경마장은 지금 공중에 아득히 흐르고 있다.
과연 나는 경마장에 가본 적이 있을까?
그 이후에 단 한 번도 과천 경마장에 가본 적이 없다. 지워져 가는 기억이 과연 기억일까. 벚꽃이 피는 나의 생일날에 여자 친구가 어디를 가고 싶냐고 묻는다. 원래는 태백에 물닭갈비를 먹으러 가려고 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즉흥적이게 계획을 바꿨다. 경마장에 가보자!
어디 고가도로 밑에 시간과 상관없이 만 원을 내면 주차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대충 차를 박아놓고 여자친구에게 생일 축하를 받으며, 팔짱을 끼고 경마장에 들어간다.
시간이 정말 많이 지났나 보다. 너무 깨끗하다. 구정물이 묻은 건물은 새 건물이 되어있었다. 흡연장은 저 멀리 따로 비치되어있었다. 가족 나들이 객도 많이 보인다. 커플들이 데이트를 하러 많이도 오는 것 같았다. 알록달록 봄옷을 입은 연인들과 검은자켓에 검은 모자를 쓴 생활 경매인들이 기름과 물처럼 섞여 들어간다.
이번에 배팅할 말을 고른다. 내 여자친구는 얌전하고 착한 강아지 같은 말을 매번 맘에 들어했다. 나는 엉망진창 까부는 말을 맘에 들어했다. 둘 다 이길 것 같은 말은 찾지 않았다. 이겼으면 하는 말을, 응원하게 되는 말을 골랐다.
둘이 합쳐 28,000원을 잃었다. 딱 한 번 확률 높은 복연승에 걸었던 것이 당첨되어 1,500원을 땄다. 매번 복승이나 복연승에 걸었던지라 결과가 처참했지 여자친구와 내가 고른 말들은 매번 3위 안에 들어와 있었다. 우리가 응원했던 기특한 말들의 좋은 성적들이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역시나 묘미는 추입이다. 후미 쪽에서 달리던 9번 말이 800m 구간 정도에서 선두권으로 무섭게 진입할 때 가장 짜릿했다. 9번 말은 여자친구가 고른 말이었다.
여자친구와 데이트하기에 굉장히 쾌적했다. 하지만 과거에 그 구질구질했던 느낌이 강하게 들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세상이 자꾸 깨끗하게 변한다. 보기 싫은 건 지워내고 없애버린다. 경마장 전광판에는 예쁘게 차려입은 커플들이 비친다. 꼬질꼬질한 경마꾼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유령이었다. 그래도 경마가 시작되면 유령들은 소리를 냈다. 개새끼 소새끼 말새끼.
귀여운 말들이 달리고 우당탕탕 먼지는 날리고 애인과 앉아서 유령들의 쌍욕을 듣고 있자니 또 한 번 맘이 편해졌다. 저 우울하게 휘날리는 벚꽃들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기분이었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