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로 제후 앞에서 모욕당했던 유비
유비가 그 옛날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에게 끝까지 예를 갖췄던 일이 재기의 희망으로 돌아온 것이다.
퇴사를 고민하는 회사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속 시원하게 '큰 한 방'을 날리고 퇴사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평소 마음에 안들던 사람에게 시원하게 욕설을 내뱉거나, 사직서를 면상에 던지거나(아쉽게도 요즈음에는 사직서를 하드카피로 제출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회사의 안좋은 점을 외부에 발설하는 등 그 모습도 다양하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은 미디어 매체에서만 등장하는 모습일 뿐,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어제까지 나와 술잔을 나누며 상사 욕을 하던 사람도, 퇴사할 때에는 그 상사에게 잘 있으라며 웃으며 인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렇다면 퇴사할 때 그동안 쌓였던 응어리를 다 풀고 나가면 안되는 것일까?
동탁이 황제를 폐위하고 폭정을 일삼자, 조조는 각 제후에게 격문을 띄워 그 유명한 '반동탁 동맥'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공손찬에 의탁하고 있던 유비 역시 공손찬과 함께 이 동맹군에 가담하게 된다. 이 때 동맹군 내에서 조조를 제외한 대다수는 명망이 없던 유비가 등장하자 탐탁지 않아 하며 홀대한다. (당시 구한말은 명성 및 평판이 그 사람의 역량이 우수함을 나타내는 징표가 되는 사회였기에, 명망이 없다는 뜻은 단순히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는 뜻을 넘어 능력과 인간됨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이후 유비군의 활약으로 화웅과 여포를 무찌르고 동탁을 패퇴시켰음에도, 동맹군 내에서 유비에 대한 대우는 여전했다. 그러나 동맹이 해산되어 제후들이 모두 떠나갈 때에도, 유비는 자신을 홀대했던 원소 등에게 어떠한 감정 표현도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반동탁 동맹'이 해산된 이후에도 유비는 공손찬, 도겸 등과 협력하여 원소, 조조 등과 대립하였다. 사실 유비는 입맹 전부터 공손찬과 같은 세력이었기 때문에, 원소와는 대치하는 관계였다고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유비는 원소와는 어느 정도 적대적인 관계로 그에게 잘 보일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인물이었는데, 그럼에도 그에게 예를 갖춘 모습만 보였다는 것이다. 이 때의 행동은 훗날 유비가 소주에서 조조군에게 패퇴했을 때 드디어 빛을 보인다. 그 때 유비는 두 아우 및 자신의 가족들과 흩어져 일부 잔존 세력을 이끌고 원소에게 의탁하게 되는데, 이 때 원소가 유비를 높게 평가하며 그를 환대한 것이다. 만약 그 때 원소가 유비를 나쁘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유비는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 재기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유비가 그 옛날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에게 끝까지 예를 갖췄던 일이 재기의 희망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유비가 퇴맹 시 예를 갖췄던 일은 '원소가 유비를 내쫓지 않을 이유'일 뿐, '그를 받아줄 이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퇴사할 때 좋게 마무리하면 언제나 이득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손해가 될 가능성 한 가지를 없앨 수 있다는 뜻이다. 살면서 예기치 못하게 여러 암초를 만나게 되는데, 굳이 안만들어도 될 암초를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순간의 감정만 잘 다스리면 인생의 화를 줄일 수 있으니, 이처럼 가성비 좋은 일이 또 있을 수 없다.
사람들 중에는 더러 자신 마음 속 응어리가 너무 커서, 지금 당장 어떻게든 표출하지 못하면 평생 한으로 남을 것 같다고 말한다. 유비도 그랬다. 그는 입촉했을 때에도 18로 제후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일을 비롯하여 그동안 받아온 수모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비는 매번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렸고, 그 덕분에 공손찬, 조조, 원소, 유표 등 여러 군웅들의 품안을 옮겨다니면서도 매번 환영받을 수 있었다. 반면, 전 주군을 베고 이적했던 여포나 위연은 그 능력이 매우 출중했지만 원술, 원소, 조조, 제갈량에게 거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