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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이가 쏘아 올린 수많은 말풍선

by 배가본드


"엄마, 학교 가기 싫어."

"그래? 가지 마."

"이씨 엄마, 그게 그렇게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는 일이야?"


나는 화가 났다. 정작 내가 꺼내놓고 싶던 건 단순히 '학교 가기 싫음!' 이게 아니라 그 뒤에 따라올 학교 가기 싫은 이유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가야만 하는 괴로움'이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그런 것들부터 늘어놓을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학교 가기 싫어" 한 건데 거기다 대고 "그래? 가지 마"가 대체 뭐냔 말이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들어주세요. 그 이유는 생각보다 복잡해요. "그럼 가지 마" 하진 말아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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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우유는 안 먹냐?"

"제가 우유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나도 밀가루 알레르기 있는데 참고 먹으며 사는데!"


밖에서 사람들과 얘기만 해도 에너지가 죽죽 빠지는 나는 이런 대화 상황에 직면하면 집에 뛰어들어와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폭 뒤집어쓰고 눕고 싶어진다. 이 말을 풀이하면 '그깟 걸로 유난 떨고 있냐?'정도 되겠고, 입에 넣는 것마다 우유가 들어갔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내 말 못 할 괴로움은 '그깟 것'으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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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정 작가님이 글에 쓰신 에피소드가 있다. 우울감을 호소하는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당연하지, 누구나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해.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할까 하고 말이야."라고 대답해 줬더니 후배가 놀라며 "언니는... 엄청 밝잖아요?" 하더라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평소 잘 웃는 모습을 보고 "넌 아무 걱정이 없겠다" 하더란다.


아무리 털털하고 즐거운 사람이라도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은 어떨지 모르고, 그때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며,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건 어떤 게 있을지 또 모른다. 누구나 자신의 모든 걸 다 보여주고 살 순 없으니 사회화된 모습으로 살아갈 뿐이다. 이걸 위선이니 다중인격이니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집에서 빤쓰만 입고 소파에 디비져서 TV 보다가 그 차림으로 슈퍼에 라면 사러 가시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은 적당한 가면을 골라 쓰고 세상에 나서면서 남들은 가면을 벗고 산다고 착각한다. 자신은 여러 페르소나를 가지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것을 내밀며 살아가면서 남들은 하나의 페르소나로 살아간다고 착각한다. 자신은 단순하게 정의되는 것을 싫어하면서 남에 대해서는 다 아는 듯 말한다. 혈액형이 뭐네, MBTI가 뭐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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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장에서는 직원 복지로 무료 힐링센터를 운영한다. 8년 전 힘든 일이 있을 때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그렇다고 누구의 눈에 띄어도 아무렇지 않을 용기까진 없어서 열 걸음마다 주위를 살피면서 걸었다. 30분 정도 나의 상황을 설명했고, 이런 대답을 받았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세요.

야근은 되도록 자제하세요.

스트레스는 최대한 피하세요.

규칙적인 운동과 산책을 하세요.

과일, 채소, 견과류 등을 섭취하세요.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사고를...


허탈했다. 여기 찾아오기로 마음먹기 전에 내가 그런 생각 한 번을 안 해 봤을까? 그래서 되는 수준의 것이면 내가 여기까지 발품 팔아 찾아왔을까? 어쩌면 이곳에선 나 말고도 모두에게 똑같은 대답을 주지 않을까? 그날 이후 그곳을 다시 찾지 않았다.


난 마음이 힘든 사람을 치유하는 회복 마법 주문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힘든 사람에게 해선 안될 말 몇 개는 알고 있다. 내가 힘들 때 듣고 기분이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던 말이라면 그건 남한테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믿는다. 세상 사람들이 다 똑같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은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힘을 내.'

'웃어 봐.'

'이것 또한 지나갈 거야.'

'그런데 우울해 보이지 않아'

'나가서 뭔가 다른 걸 하면 돼'

'너만 힘든 거 아냐, 다들 그렇게 살아.'


이런 말들에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는, 듣는 사람의 감정이나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어렵게 속내를 털어놓았는데 돌아오는 게 이런 말이면 아예 상대에게 속을 털어놓은 것부터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상황의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건 누군가에게 나의 상황을 가감 없이 이해받았다는 느낌이다. 오로지 그 느낌 하나로 스스로의 힘으로 딛고 일어선다. 그 하나가 안되면 자기 치부를 애써 드러낼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는 그때 이런 말들이 하도 싫어서 남들에게 털어놓고 이해받기를 아예 포기하다가 어느새 나 자신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 까맣게 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상태보다 그게 훨씬 위험한 상태였더군.


난 그런 종류에 속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을까? 많았다. 아주 많았다. 누구한테 못생긴 말풍선을 얻어맞으면 지난날 내가 쏘아 올렸던 오물 풍선이 생각나서 숨고 싶어진다. 내가 듣고도 왜 기분 나빴는지 생각해 보지 않고 그저 내 마음만 지키려고 재빨리 마음에서 내버리는 데만 급급하니 정작 내가 반대 입장에 서서 어떤 말이 떠올랐을 때 이게 해도 될 말인지 아닌지 헤아리지 못했다.


듣고 있다는 신호를 주려고 무슨 말이라도 하려다 그랬을 테지만 그 신호를 반드시 말로 주어야만 하는 건 아님을 잊지 않고 싶다. 못생긴 말풍선은 높은 확률로 그 순간에 쏘아 올려진다는 사실을 이젠 알기에, 그럴 때는 말이 아닌 다른 방법을 고민하며 살고 싶다.


우리가 진정으로 공감하는 데 필요한 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도, 동질의 경험도, 감정이입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공감하려면 무엇보다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외부로 표출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듣고 바라보는 판단 중지의 태도부터 가장 먼저 갖고 싶다. 사람을 해석하거나 이해하는 건 그 다음다음쯤 되는 일임을 잊지 않고 싶다. 공감과 유사한 감정에 빠져 사람을 잘못 이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의 경험에 근거해 사람을 판단해 놓곤 이런 행위를 공감으로 착각하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저마다 나 자신이 듣기 싫은 말이 뭔지 알고 있다. 그런 말들을 하나둘씩 빼 나가면 결국 남는 건 해도 괜찮은 말들 아닐까. 그렇게 될 때쯤 우리도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뭐 빼고 뭐 빼고 하면 목젖에서 죄다 기각되고 남는 게 없어져서 어쩌면 중간밖에 못 갈 수도 있지만, 정작 내가 가장 되고 싶은 게 바로 그 중간이다.


오래 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걸 염두에 둔 상태이다. 맞다고 보는 방향이 있으면 그쪽을 향하거나 바라만 보아도 충분하다. 어수룩해도 번번이 이로운 과정이 우리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세상은 그런 미비한 과정을 얼마나 많이 필요로 하는가. 평생 연습만 하고 살더라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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