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한 명 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호리호리 한 체격인데 반해 동생은 어렸을 적부터 통통했고 커가면서는 점점 뚱뚱해졌다.
어렸을 때야 통통함이 아이다운 귀여움이었겠지만 커가면서 점차 이게 아니다는 것을 알았을 땐 뭔가 이미 늦은 것만 같았다.
부족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넉넉하진 않았기에 먹을 것이 차고 넘치지도 않았다. 동생이 그렇게 많이 먹는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자고 일어나면 동생의 몸은 더 커져있었다. 내 몸이 아니니 나도 그러려니 했고 처음엔 잔소리를 하던 부모님도 조금씩 내려놓으셨다. 그렇게 동생은 먹어가는 나이만큼 아니 그 몇 배로 커진 몸을 분신처럼 이고 다니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성격만큼은 쾌활하고 밝았기에 동생의 주변엔 늘 친구들이 많았다. 멀리서 보면 꽤 체급차이가 나는 자기보다 작고 아담한 친구들이었지만 가까이 가보면 영락없는 또래 아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동생과 친하지 않거나 혹은 처음 보는 낯선 이들의 시선은 좀처럼 멈추지 않고 따라다녔다. 동생과 같이 길이라도 걸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가족 모두를 쏘아대는 듯 불편했다. 동생은 이미 익숙한지 혹은 알고도 못 본 체하는지 무시했지만 나는 이따금 화가 나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되받아쳤다.
하지만 동생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언제부턴가 엄마에게 용돈을 자주 달라고 했는데 나로서는 그게 불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은 동생의 등하교에 쓰인 택시비였다.
세상에! 누가 학교 가는데 택시를 타?!
처음엔 이해도 안 되고 화가 났다. 하지만 알고 보니 동생은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인 택시를 타는 것으로 그 불편한 상황을 회피한 것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작은 읍인 이곳에서 내 동생을 모르는 기사님은 없을 정도로 그렇게 동생의 회피는 계속되었다.
그땐 동생과 그다지 친하지 않은 언니였기도 하고 나 역시 어렸기에 동생의 닫힌 마음을 어루만지기보다 그저 살 빼라는 잔소리와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점차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진 동생과는 어쩌면 그때부터 서로의 마음을 닫아온지도 모르겠다.
졸업 후 대학 때부터 직장생활까지 늘 부모님 곁을 떠나 있던 나와 달리 동생은 늘 부모님 곁에서 예민한 어리광을 부리며 함께했다. 나를 대신해 늘 부모님 곁을 지키는 동생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감정 표현에 서툰 언니가 되었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남자 친구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표현들인데 신기하게도 동생에겐 쉬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동생은 어려서부터 아빠가 언니만 편애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중학교 때였던가 우연한 계기로 조금씩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내 성적이 오르자 아빠는 나를 박사라며 추켜세우셨다. 사실 그럴만한 실력엔 한참 모자라지만 그 옛날 배움의 기회를 놓친 게 평생의 한이 될 부모님에겐 그렇게 자랑스러우셨나 보다. 그렇게 나에 대한 기대와 칭찬에 우리 가족 모두가 집중해 있을 동안 동생의 외로움은 그렇게 잊혀갔다.
당시 두 명을 동시에 대학을 보내비 부담스러웠던 부모님은 그렇게 동생에게 취업을 권유했고 그때만큼은 질 수 없었던 동생은 전문대를 진학했다. 결과는 그러했지만 언니 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할 뻔했다는 사실은 동생의 마음에 적잖은 상처가 되었고 이 상처가 곪자 동생은 더 날카로워졌다.
언니가 남자친구라도 사귈라치면 늘 언니는 이기적이라며 자기만 부모님을 챙긴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곤 했다. 당시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며 자취를 하는 내게 혼자만 나가서 제 하고 싶은 것을 다한다고 말했다.
나 역시 혼자 살면서 모든 게 처음인 낯선 생활과 적응해야 했기에 동생의 날카로운 말을 회피했고 언제부턴가 우린 따뜻한 안부보다 필요한 말만 전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후 나는 결혼해 독립된 가정을 이뤘지만 동생은 여전히 부모님 곁에서 함께했다. 솔직히 가족 모두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동생의 결혼이 걱정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뚱뚱하다는 시선에 움츠러들기 일쑤였던 동생은 성인이 되자 마음먹고 운동을 하기 시작하더니 6개월 만에 50킬로 가까이를 감량해 냈다. 웃으며 꺼내든 과거의 옷들은 이미 낯선 거푸집이 되어 버렸고 이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 왜 진즉 찾아오지 않았을까 원망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 모든 걸 이겨낸 동생이 대견했고 그간 보이지 않던 희망이 보였기에 가족 모두 기쁘고 행복했다.
동생의 건강, 결혼을 늘 속으로만 삼켜내곤 했던 부모님도 이젠 안심이 되셨는지 자연스레 동생의 연애와 결혼을 기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남자친구가 있다고 알려왔다.
솔직히 서프라이즈였다. 늘 혼자 살 거라고 결혼하기도 싫고 계속해서 부모님 곁에 있겠다고 선언하던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의 입에서 연애라는 낯선 단어가 흘러나왔을 때 신기했고 또 반가웠다. 주말마다 부지런히 데이트를 하며 자신의 또 다른 행복을 찾아 나선 동생이 대견했다.
어렸을 적부터 남들의 차디찬 시선을 견디며 연애라는 감정과 척을 지며 살아온 동생에게 찾아온 낯선 사랑을 우리 가족 모두 두 손 모아 응원했다.
그렇게 우리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사람은 자기와 반대되는 사람에게 끌린다고 했던가.
상견례에 처음 마주한 예비 제부는 한눈에도 빼빼 마른 체형이었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동생이 좋고 사랑하면 그만인 것을. 동생의 신랑을 보게 될 날이 과연 올까 하고 막연히 생각한 게 엊그제 같은데 나는 어느새 동생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으며 그간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전히 예민한 구석이 있는 동생이지만 말은 그래도 속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정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사실 동생에게 내 근심을 이야기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아무리 언니에게 질투와 서운함과 원망이 있더라도 한편에는 늘 언니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에겐 늘 볼멘소리를 하지만 친구들에겐 늘 언니자랑을 한다고 동생의 친한 친구에게 들었다. 내가 뭐라고...
그런 동생에게 언니의 힘듦을 알리는 게 왠지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가정에 힘든 일이 있어도 장녀니까 언니니까 그렇게 무겁게 버텨내야만 하는 줄 알았다. 말한다고 크게 바뀌거나 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곪아가는 속을 그 누구에게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계속되는 방황에 지쳐가는 어느 날 문득 그냥 정말 문득 동생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떤 답을 얻고 싶은 생각보다 그저 내 가까운 누군가가 들어줬으면 그게 너였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 동생아, 자?"
"아니 안자. 언니 왜?"
" 실은 언니가 니 형부 때문에 지금 너무 힘들어. 애를 같이 키워야 하는데 계속 직장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방황하네.
사실 좀 오래됐어.. 엄마아빠 걱정할까 봐 얘기 못하겠고 너한테도 못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문득 얘기하고 싶었어..."
" 언니 그동안 왜 얘기 안 했어. 언니 많이 힘들었겠다..
언니 그런데 형부도 힘들지 않았을까?"
...
사실 놀랬다. 나는 내 이야기를 듣고 동생이 남편을 비난하고 책망할 줄 알았다. 하지만 동생은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언니도 힘들었겠지만 형부도 오죽하면 그러셨겠냐고 이야기한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어쩌면 내가 한 선택을 내 가족이 비난하는 게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동생의 말에 참았던 내 감정이 한순간에 위로받는 것처럼 격양되었다.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었던 저 밑바닥 어딘가에 철저히 외면된 나도 몰랐던 감정들이 폭발했다.
" 동생아, 언니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많은 위로가 되었고 힘이 되었어."
빈말이 아니고 정말 진심이었다.
늘 예민한 투정만 늘어놓는 동생이었기에 이렇게 내가 털어놓을 수 있을지도 기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동생은 단지 형부의 잘못된 행동만 본 것이 아니라 그간 늘 다정하고 세심했던 형부의 진심과 마음도 함께 보았기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건넨 것이다.
내 머릿속 동생의 반응은
"그래 언니가 뭐가 아쉬워서 그래. 헤어져 언니!"
였는데 실상은 그 누구보다 우리 가족 모두의 내일을 행복을 염두에 두고 소신껏 이야기해 주었다.
늘 내 이야기를 자르며 제 하고 싶은 말을 다해내던 동생은 어디 가고 오랜 시간 언니의 고백을 듣고 진심을 다해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 동생에게 내 고민을 이야기하고 나니 정말 거짓말처럼 마음 한편이 홀가분해졌다.
그간 나름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포장했던 불편한 진실이 이젠 어느 한 사람에게만큼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뻤다.
앞으로 인생에서 더 많은 일이 펼쳐지겠지만 그 희로애락을 함께 나눌 이제는 같이 나이 먹어갈 피붙이가 있다는 게 새삼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