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모든 사람이 시간당 60분의 속도로 도달하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가 누구이든."
- C.S. 루이스 (C.S. Lewis)
박진태 대표의 시선은 조수석에 놓인 한우 세트에 머물렀다. 선홍빛 살코기 위에 눈꽃처럼 피어난 마블링. 현우의 작품이 완성을 향해 가는 동안 그의 피골이 상접해가는 모습을 본 뒤, 직접 고른 것이었다. 이토록 누군가에게 마음을 쓴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가치를 발견하는 재주가 있을 뿐이었다.
강현우라는 작가는, 진태의 그런 안목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존재였다. 젊고 재능이 넘치는 원석. 바로 그 점이 진태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진태가 현우를 처음 만난 곳은 2024년 여름의 드라마 촬영 현장이었다. 신예 작가가 프로들로 가득한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모습. 그 카리스마에 진태는 마음을 빼앗겼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그는 현우를 붙잡아 명함을 건넸다. ‘드림캐쳐 영화사 대표 박진태’.
현우의 미니시리즈가 뜨거운 반응을 얻은 후, 세 사람은 드림캐쳐 영화사 회의실에서 다시 만났다. “두 남녀의 내면과 입체적 관계성에 초점이 맞춰진 실존주의 로맨스 시나리오를 원합니다.”
진태의 주문에, 현우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가방에서 낡은 시나리오 뭉치를 꺼냈다. 종이 모서리가 손때에 닳아 있었다.
“이것을 기반으로 전개해보고자 합니다.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한 시간의 정적 아래, 시나리오집은 세 사람의 손에서 빠르게 넘어갔다.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회의실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마지막 페이지가 덮이자 진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시나리오 재밌네요. 어때요, 감독님?”
“다듬을 부분이 많긴 하지만 충분히 좋은 뼈대였습니다. 작가님 말씀대로 수정되는 걸 봐야 정확한 피드백이 되겠네요.”
늘 조심스러운 준영의 말에 진태는 혀를 내둘렀다. 그는 현우를 향해 몸을 돌렸다.
“큰 골자는 이렇게 가도 되겠습니다. 언제 이런 게 뚝딱 나왔대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뚝딱 나온 건 아닙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제일 친한 친구와 썼던 제 인생 첫 시나리오입니다. 처참히 실패했던 습작이죠.”
“어쩐지 어른스러움과 어리숙함이 공존하더군요.” 진태가 말했다. “그럼 이게 작가님의 첫 작품인 셈이네요?”
현우가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준영도 관심이 동했다. “직접 촬영, 편집도 하셨다고요? 그래서 현장에서 그런 피드백을 할 수 있었던 거구나.”
“하하. 첫 영상화가 망하고 정신이 번쩍 들어서 독학했습니다. 제 글이 영상물로 구현될 때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현우가 대학 시절, 영화학 개론부터 촬영, 조명, 시나리오 작법까지 파고들었던 이야기를 풀자 영상영화학을 전공한 진태와 준영은 더욱 눈을 빛냈다.
“이 감독이 작가님이 저랑 비슷한 구석이 많다고 하더니 이유가 있었네요.”
진태는 자신과 닮은 현우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준영은 작업의 완성도를 위해 영상 공부까지 한 작가라는 점에서 깊은 신뢰를 보였다.
“내가 확실하다고 했잖아요. 둘이 생각하는 패턴이 참 비슷하다니까. 이번 작품 다 같이 한 번 잘해봅시다.”
현우는 두 사람의 따뜻한 시선에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이 시나리오를 좀 고쳐오겠습니다.”
“그래요. 그거 보고 확실하게 컨펌하는 걸로 하죠.”
현우가 떠난 뒤, 회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준영이 미끼를 던졌다. “어때? 강 작가 마음에 들어?”
“강 작가가? 아니면 강 작가의 시나리오가?”
“아오! 둘 다! 생긴 건 곰인데 하는 짓은 영락없는 여우야.”
“강 작가, 마음에 들어. 외모부터 시작해서, 네 말마따나 정말 젊었을 때 나를 빼다 박았더라.”
준영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외모는 양심 없지. 강 작가는 뽀얀 아랍상인데, 너는 까무잡잡한 취두부 상이잖아?”
“이게 다 너 먹여 살리겠다고 땡볕에서 골프 쳐서 그런 거지.” 진태는 말꼬리를 자르고 본론을 꺼냈다.
“그나저나 시나리오는 어떻게 생각해? 남자가 썼다는 게 의심될 정도로 내면 묘사가 정확해.”
“나도 비슷해. 잘 다듬으면 내 인생 필모그래피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준영이 떠나고, 혼자 남은 진태는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아무 연줄 없는 그에게서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보는 듯한 묘한 기분. 진태는 이번에도 자신의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몇 달 뒤, 현우가 폭탄선언을 했다. 췌장암 말기. 진태는 애써 표정을 유지했지만, 넥타이가 목을 조여오는 듯했다. 자신을 닮은 조카가 죽어가는 듯한 기분, 그리고 이 순간에도 작가 교체와 손익을 계산해야 하는 냉혹한 현실. 그는 현우의 마지막 열정을 믿고 그의 각오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2025년 5월 7일
“강 작가님, 이건 몸보신 좀 하시라고 챙겼어요.”
“대표님, 이런 건 정말 괜찮습니다. 집에 가져가서 아이들 챙겨주세요.”
“우리 집사람이랑 애들 거는 따로 사놨죠. 먹고 힘내서 작품 마무리 잘해봅시다.”
현우가 상자를 받으며 말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준영이 진태를 툭 쳤다. “40년을 알고 지내는 동안 한우 세트는 처음이라.”
“야, 이 감독! 내가 횡성 가서 사준 소는 미국산 소냐?”
준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받아쳤다. “대표님, 여기는 사석이 아닙니다. ‘한우 세트’는 받아본 적이 없어서요.”
현우는 간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두 분 정말 친한 친구 맞으시네요.” 그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테이블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더 신경 못 써서 미안할 따름입니다. 건강 챙기면서 이 작품 마무리하고, 병도 훨훨 떨쳐내봅시다.”
둘의 심정을 알지만, 현우는 냉철했다.
“감사합니다. 다만, 제게 그렇게 긴 시간이 남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해서 오늘 두 분께 미리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진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얘기해보세요.”
“첫째, 제가 세상에 없더라도 이 작품을 저만큼 이해하고 깊이 있게 만들어줄 자문 위원 두 사람을 붙이는걸 허락 해주십시오.”
진태는 망설임이 없었다. “어렵지 않을 겁니다.”
“둘째, 영화 종영 후 이 시나리오집을 출간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문제없습니다.”
“그럼 그 시나리오집 초판이 나오면 이 주소로 한 부 배송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한 중요한 약속인데, 직접 지키는게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이게 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진태는 주소가 적힌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얇은 모서리를 스쳤다. “누구 주소인가요?”
“예전에 학원에서 가르쳤던 제자입니다.”
진태는 ‘그때까지 잘 버텨서 직접 전달하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래요. 걱정 마세요.”
그는 마치 유언이라도 전달받은 사람처럼, 약속의 무게만큼 묵직해진 종이를 손에 쥐었다.
현우는 오랜 숙제를 풀어낸 사람처럼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가방에서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원고 뭉치 두 개를 꺼내 테이블 위로 조용히 밀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원고를 다 읽은 진태와 준영은, 현우가 왜 지금 결말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그는 정말 마지막 장면을 제외한 모든 이야기의 끝을 만들어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