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세월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세월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다."
"Love is not a matter of counting the years, but making the years count."
- 미셸 아망 (Michelle Amand)
2020년 10월 25일.
2020년 10월 25일. 선선한 일요일 오후, 하윤의 자취방. 작은 케이크 위에서 촛불 세 개가 아슬아슬하게 춤을 추었다. 연애 3주년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붙어 앉아 핸드폰 액정 속 지난 사진들을 넘겨보았다. 달콤한 포트와인이 잔 속에서 붉은 물결을 그렸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아 보였지만, 사진을 넘기는 그녀의 손가락과 케이크를 자르는 그의 손길이 아주 미세하게 어긋나는 듯했다.
알코올 기운이 뺨을 덥히자, 하윤이 현우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현우는 그런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익숙한 샴푸 향이 났다.
“하윤아, 자?”
하윤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아니, 안 자. 근데… 나 할 말이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와인보다 더 진한 용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현우의 가슴에 닿은 머리카락 끝이 잘게 떨렸다.
현우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 뭔데?”
“음…”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자기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
현우는 하윤을 일으켜 세우고 그녀의 양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뭐 어때, 얘기해봐. 난 언제나 네 편이야.”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그녀의 눈빛이 조금 풀렸다. “그럼 우리 잠깐 걷자. 소화도 시킬 겸.”
하윤의 집 앞 공원은 밤공기에 인적이 드물었다. 가로등 불빛만이 긴 그림자를 만들며 두 사람을 따라왔다. 하윤이 발에 걸린 돌멩이를 툭툭 차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지금 하고 있는 일 그만두고 싶어.”
“그래. 그럼 그만둬야지.” 현우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근데 왜? 회사에서 힘든 일 있었어?”
그의 즉각적인 반응에 하윤은 오히려 당황했다. ‘뭐가 이렇게 쉽지?’ 그녀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원한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공감이었다.
“아니야. 회사야 뭐 매번 같지. 그냥… 이 일을 하면서 내가 행복하지가 않아. 지금이 다시 내 꿈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시기인가 봐.”
“어떤 꿈을 꾸고 있는데?” 또다시 질문이었다. 모든 것에 명확한 답을 가진 현우에게, 그녀의 불투명한 고민은 해결해야 할 문제처럼 보였다.
하윤이 걸음을 멈추고 현우를 바라보았다. “딱히 지금 꿈이 있지는 않아. 그래서 고민하는 시기라고 한 거야. 난 지금 내가 누군지 정확하게 모르겠어. 언제나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넌 모르겠지만, 나처럼 모든 게 불분명하고 불안한 사람도 있는 거야.”
“미안. 누구나 불분명한 시기가 있지. 다만 자기가 워낙 어른스러운 사람이니까 내가 좀 당황해서 그랬어.”
“난 한 번도 어른이었던 적이 없어. 어른인 척했을 뿐이지.” 그녀의 목소리가 밤공기 속에 쓸쓸하게 흩어졌다.
“적어도 나는 자길 어른으로 존중해. 앞으로 그 꿈 찾는 거, 내가 옆에서 더 열심히 도울게.”
'어쩜 이래. 매번 이렇게 모든 답이 있어.' 하윤이 입술을 삐죽였다. “어떻게 도와줄 건데?”
“진짜 취향을 찾을 수 있게 같이 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줄게. 전시회든, 원데이 클래스든…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알 수 있게.” 현우의 눈은 진심으로 반짝였다.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는 듯했다.
하지만 하윤에게 그의 제안은 또 다른 숙제처럼 느껴졌다. 그의 선의가 버거웠다. 그의 속도에 맞춰, 정해진 시간 안에 '꿈'이라는 정답을 찾아내야 할 것 같은 압박감.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그래. 뭐, 해보자. 어떤 식으로든.”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속도에는 점차 큰 차이가 생겼다. 첫 한두 달은 주말을 꽉 채워 공연도 보고 전시도 보며 즐거웠다. 하지만 서너 달이 지나자 하윤의 체력이 부쳐왔다. 평일 내내 회사 일에 시달리고 맞이하는 주말은, 그녀에게 휴식이 아니라 또 다른 ‘과제’가 되어 있었다.
2021년 봄, 벚꽃이 흩날리는 계절이 돌아왔으나 하윤의 일상에는 활력이 돌지 못했다.
그녀는 빡빡한 주말 일정에 대해 이야기할 참이었다.
“현우야, 나 지금처럼 주말을 꽉 채워서 쓰는 거 못할 것 같아. 회사 출퇴근만 해도 몸이 천근만근이야.”
현우는 당황했다. “많이 힘들었어? 미안해. 나는 자기가 꿈을 찾고 싶다고 하니까, 빨리 뭘 하려면 꽉 채워 써야 한다고 생각했어.”
“알고 있어. 나도 최대한 맞춰보려고 했는데 안 될 것 같아. 조금 조절하자.”
“그래. 어느 정도로 조정해볼까?” 현우는 더 이상 실수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한 얘기지만, 오히려 하윤을 막막하게 했다.
“그냥… 그때그때 상황 봐서. 가끔은 그냥 쉬고 싶기도 해.”
현우는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 스치는 실망감을, 하윤은 모를 수 없었다. 자신도 쉬는 날 없이 달리며 주말을 그녀에게 쏟아붓는데, 그녀는 목표를 찾는 것 자체에 열정적이지 않은 듯했다. 현우는 어깨가 허탈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하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갈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현우와의 ‘꿈 찾기 프로젝트’는 그녀에게서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을 앗아갔다.
하루 뒤, 하윤은 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현우야, 미안해. 나는 도전적인 삶이 당장에 필요한 게 아닌 것 같아. 너랑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내 목표는 새로운 직업이 아니라 너랑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거라는 걸 깨달았어. 오늘 퇴근하고 얼굴 볼 수 있어?'
휴대폰 화면에 뜬 그녀의 메시지는 며칠간의 냉전을 녹이는 항복 선언처럼 보였다. 현우는 바로 답장했다.
퇴근하고 바로 갈게. 이따 봐요.
그날 저녁, 하윤은 현우가 씻고 나올 동안 과일을 차려놓았다.
현우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을 보고 하윤은 내심 기뻐하는 듯했다. “우리 데이트 말인데, 내가 너무 내 멋대로 끌고 다녔지.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얘기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이것저것 하는 건 좋은데, 체력을 생각해서 하루에 한 개 정도만 하고, 어디 앉아서 같이 글 쓰자.”
난데없이 글을 쓰자는 이야기에 현우는 놀랐다. “한동안 글 쓰자는 이야기 없었잖아?”
“공모전 이후로 마음에 여유도 없고 내가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서 좀 멀리했는데, 꼭 같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도 네 옆에서 글 쓸 때가 제일 편안해.”
현우는 기뻐서 그녀를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나는 글 쓰는 게 싫어진 줄 알고 말도 못 꺼내고 있었는데!”
하윤이 급 정색하고 현우를 응시했다. “객관적으로 봐야지. 약점을 보완하려다 서로의 약점이 될 수도 있어.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작업을 하고, 도울 부분이 있을 때만 돕는 거야. 이제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할 일을 해보자고. 나랑 가정도 이루고 싶다며?”
“맞아.”
“그러면 이제 서로 책임감 있게 해야 할 일을 하자.”
“좋아.” 똑 부러지는 하윤의 의견에 현우는 홀린 듯 동의했다.
그녀의 눈에 깃든 새로운 의지를 보며, 그는 잠시 자신의 조급함을 잊었다.
“그리고 조만간 우리 부모님이랑 밥 한번 먹으면 안 될까? 계속 남자친구 있다는데 선보라고 하셔서. 자기랑 만나는 거 안 믿어주시는 것 같아.”
현우는 첫 키스를 할 때보다 심장이 더 세차게 뛰었다. 지난 몇 달간 두 사람을 짓누르던 모든 불안과 어색함이 그 한마디에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결혼에 무심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내디딘 결혼으로의 한 걸음. 그의 온몸의 피가 뜨거워졌다.
“나야 좋지. 근데 괜찮겠어? 나 보여드려도?”
“우리 자기가 어디가 어때서? 그리고 보여 드려야지, 슬슬 결혼할 사람이라고.”
그의 이성은 이미 날아가고 없었고, 머릿속에는 ‘결혼’이라는 두 글자만 박혔다.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자취방의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럼 뭐 당장 내일 뵙자고 할까?”
“크크, 뭐래. 그럼 이번 주말 어때?”
“좋아. 그럼 바로 뵙도록 하자.” 그날은, 현우의 인생에서 설렘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