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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지윤 Nov 03. 2024

서운함과 사랑의 한 끗

30대 엄마의 성장통



“지윤~ 오늘 잘 보냈어?”

지금으로부터 9년 전, 26살 무렵의 나의 일과는 이랬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와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대충 샤워하고 이것저것 작은 일들로 오늘 하루 쌓인 불필요한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밤 10시가 되었고 그때 가장 반가운 전화벨이 울리곤 했다.


‘딩동’,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조언자이자 든든한 응원자인 내 남자친구는 매일 저녁 나의 안녕을 물어주었다. 그는 내 목소리의 톤으로 내 하루를 읽어주기도 하고 내 일과를 물어보기도 하면서, 자세히 서로의 하루를 스케치하듯 우리의 하루를 함께 그려가곤 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대화를 방해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통화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들이었다. ‘철커덕, 위잉, 쉭, 샥샥..’


나의 일상에서는 결코 들어볼 수 없는 소리들이 항상 들려왔고, 그것들이 가끔 거슬릴 때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친구는 화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이었고 실험을 주로 하느라 밤 10시는 그의 오전 10시 같은 한창일 시간이었다.


실험이 주된 업무이다 보니 남자친구는 모든 일상을 그것에 맞는 생활을 했고, 시간을 내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남자친구는 포항, 나는 대전에서 거주했기에 어쩌다 만나는 주말에는 차에서 잠이 들기도 했고 우린 주로 산책을 하거나 휴식을 많이 하는 데이트를 해야 했다. 대전이 주 거주지다 보니 남자친구가 항상 올라왔는데 그러다 보니 나는 주로 피로가 풀려있고 남자친구는 피곤한 컨디션이였다. 그래도 최대한 나를 맞춰주려 노력하였다.


26살 여러 가지의 데이트와 가고 싶은 장소와 해보고 싶은 액티비티들이 너무 많았는데 시간제한이 있다 보니 항상 우린 동네만 걸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남자친구의 업무는 점점 더 많아졌고 태양계를 도는 행성들처럼 실험이 남자친구의 모든 삶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은하계에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깊게 들었다.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다 보니 아름답던 우리의 스케치는 대애충 밑그림만 겨우 그린 완성도 없는 대화들이었고 점점 지쳐갔다. 그러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달그락 소리가 유독 거슬리던 어느 날 난 4주째 얼굴을 못 보는 상황이 너무나도 서운하고 왜 나는 이런 연애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화에 휩싸여 무작정 포항티켓을 끊었다.


외박에 대한 룰이 강했던 우리 집이었어서 포항을 당일로 갔다 와야 한다는 부담으로 한 번도 가지 않았지만 그날은 결단코 내려갔어야 했다.


만나면 말해야지,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만날 수 없다고, 나도 남들처럼 재밌고 추억이 많은 연애를 원한다고.. 이런 연애면 난 그만할 수도 있겠다고..‘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머리에 잔뜩 그려 넣고 드디어 한 시간 십칠 분이 지나 포항역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작고 깔끔했고 어딘가 이국적이지만 낯설진 않았다.


기차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며 아래를 보니 깔끔한 코트에 깨끗한 로퍼를 신었지만 어딘가 더벅한 머리를 한 남자친구는 활짝 웃는 미소로 피곤함을 가린 채 날 반기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딘가 가슴 한편이 아렸다.

‘뭐지..?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싶은 말 다해야 하는데.’ 나는 생각한 대로 분위기를 주도하긴커녕, 관성대로 남자친구를 반겼다. 남자친구는 크게 숨을 내쉬더니 연신 와줘서 고맙다며 너무 기뻐했다.


계속하여 느껴지는 왠지 모를 아련함에 나는 나의 할 말의 30%를 잊어버렸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우리는 택시를 탔다. 그리고 재빨리 난 제일 먼저 남자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나 학교랑 실험실 구경해도 돼? “

”아 정말? 그럼 그럼 물론이지..! “


포항에 와서 바다와 회가 있는 곳이 아닌 남자친구의 학교와 실험실을 가자고 하는 내가 남자친구는 놀란 눈치였지만 싫지 않았는지 살짝은 고조된 목소리로 학교의 스폿들을 소개해 주었다.


예쁜 연못, 어딘가 운치 있는 캠퍼스의 전경은 온화하고 깊은 남자친구와 닮아있었고 우린 서둘러 실험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난 이놈의 실험실이 정말 싫었다, 남자친구가 나에게로 오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서 어린 맘에 얼마나 대단한 곳이길래 하며 연신 미운(?)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더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실험실의 문을 열자마자 속 깊은 곳에서 뜨겁게 차오르는 부끄러움과 알 수 없는 미안함으로 인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험실은 삭막 그 자체였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스테이션, 서로 대화할 수 없는 칸막이와 앉아 있지 못하는 실험 환경과 일정, 끊임없는 기계들의 작동소리의 고요한 소음은 내 귀를 꽉 채웠다. 이곳에서 추운 새벽 밤을 새우며 홀로 실험을 하는 남자친구가 그려져 심장이 빨라지고 목이 매여왔다.


실험 스테이션을 지나 코너를 도니 작은 한 편의 마련된 남자친구의 책상이 보였는데 깔끔하다 못해 공허하게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왼쪽에 안쪽에 위태로이 액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사진 속의 주인공은 나였다. 그 안에 나는 활짝 웃고 있었다.


책상 서랍 안 들을 열어보니 내가 보낸 핫팩, 립밤, 영양제, 편지등이 놓여있고 그 외엔 전부 실험에 관한 것들 이였다.


”하하, 실험실 별거 없지? 여기가 내 자리고 여긴 자기 사진도 있어... 음.. 우리 실험실 커피 맛있는데 한잔 줄까? 아 맞다 우리 좋은 카페 가기로 했지? 오늘 내가 좋은 곳 데려가 줄게! “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가득 찬 남자친구의 자상한 목소리에서 내 결심은 온 데 간데 없어지고 난 와르르 울며 무너졌다.


”엉엉.. 미안해.. 많이.. 정말.. 몰랐어.. “


무슨 상황인지 알턱이 없는 남자친구는 당황해했고 황급히 우리는 자리를 옮겨 실험실을 나와 근처 벤치로 갔다.


”너무 미안해.. 사실 그동안 전화로만 데이트하고.. 자기가 실험만 해서 너무 외롭고 괜스레 서운해진 마음이 있었는데.. 오늘 자기의 일상을 보니.. 이곳에서 유일한 하루의 행복이 나였을 거란 생각에.. 새벽에도 이곳에서.. 혼자 춥게 실험했을 생각에... 그것도 내가 나의 감정을 쏟아놓는 날이면 아무 데도 설 곳이 없었을 거란 생각에... 엉엉...”


남자친구도 붉어진 눈시울과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하였다.


“지윤아 괜찮아.. 다 괜찮아.. 내가 미안해. 고마워.”


척박하고 차가운 실험실의 공기가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계속 됐었을 남자친구의 일상에 유일한 온기를 주었던 내 전화 한 통의 무게가 이토록 큰 것인지를 머리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와보니 완전히 틀렸었다. 난 하나도 모르고 있었던 거다.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단 말을 하면서도 본인의 하루를 겨우 살아내고 있었어야 했던 남자친구는, 힘든 내색 없이 온전히 날 사랑해 주고 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과 참회로 이루어진 나의 고백이 남자친구의 추운 일상을 또한 감싸주었는지, 어쩐지 남자친구의 얼굴은 전 보다 긴장이 풀려있었다. 그렇게 가장 절절한 손깍지를 끼고 우린 수소문하여 찾아낸 로컬 횟집과 환상적인 바닷가에서 불꽃놀이를 보고 난 서둘러 대전행 막차기차에 올라탔다.


기차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남자친구’ 딩동이는 그날따라 남자친구가 아닌 ’그 사람’으로 온전히 보였다. 언제나 든든하고 넓은 사람인데 어쩐지 포근히 안아주고 싶은 맘을 들게 한 그를 더 사랑하게 된 날이었다. 오해와 이해는 한 끗이라고 하더니 그 한 끗의 노력은 생각보다 명확했고 그것은 그의 일상 속에 온전히 스며들 때임을 깨달았다. 그리곤 포항을 내려올 때 가져왔던 나의 이기적인 결심은 대전을 올라가며 그 사람을 향한 강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네, 남편분은 굉장히 빠르고 부지런하신 성향이시고 아내분은 느긋하시고 매사에 융통성이 있으신 분이세요. 서로의 일상을 보시니까 어떠세요? “


내가 즐겨보는 티비 프로그램에 오은영 박사님이 하신 말씀처럼 우린 가까워서 서로를 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서로의 일상에 관심이 없을 때가 너무나도 많다. 대신 나의 일상의 그 사람의 역할에만 너무나 집착하곤 한다.


항상 책임감 있고 멋진 아빠의 하루는 어땠는지 왜 오늘은 어쩐지 지쳐 보이시는지, 사랑스럽고 소녀 같은 엄마는 왜 오늘 잠을 못 주무신 건지, 흔들 그네를 타고 있던 동네 할머님은 왜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건지, 그냥 보고 있으면 보이지 않지만 보려고 하면 알게 되는 일상의 ‘그 사람’을 알아가려는 노력은 우리의 서운함을 더 큰 사랑으로 바꿔줄지도 모른다.


그 후 매일 밤 10시, 난 남자친구의 안부를 먼저 묻기 시작했다. 하루는 어땠는지 지금은 무슨 기계를 쓰고 있는지 어떤 실험인지 마음은 어떤지. 남자친구를 넘어 그 사람이 궁금해졌고 그의 하루가 나의 하루 한편에 온전히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나를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러니까........  9년이 흐른 지금 어떻게 되었냐고?...... 그건 다음 편에 들고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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