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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벽 앞에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by 너울

고독의 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만큼 그것의 내용이 미묘하고 모호한 셈이 된다. 고독의 문제는 바로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의 소외 문제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조각조각 쪼개져서도 그 조각난 개개인으로 하여금 ‘흩어져’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아마 ‘사유’라는 답변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지음


고독의 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기에, 언제나 미묘하고 모호하다. 신영복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고독을 생산과 분배의 구조 속에서 비롯되는 소외의 문제로 보았다. 그렇다면 조각조각 흩어져 살아가는 개인들을 이어주는 힘은 무엇일까. 그는 ‘사유’라고 답한다.


사유의 벽은 어떤 물리적 벽보다 단단하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온전한 나를 지켜주는 방어막이 되지만, 동시에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차단하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글을 쓰는 순간의 나 또한 그러하다. 책상 앞에 앉으면 세상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나온 듯하다. 그 안에서 안전함을 느끼지만, 오래 머물면 메아리만 남아 외로움이 번진다. 벽은 나를 지키는 동시에 나를 가둔다.


그렇다고 사유 없는 삶이 더 나을 리는 없다. 사유 없는 고독은 그저 공허일 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온전한 나’가 서 있어야만 다음이 가능하다. 그래서 고독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나를 단단히 세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두께다. 벽은 두꺼울수록 안전하지만, 동시에 더 많은 차단을 불러온다.


신영복 선생이 강조한 것은 아마도 ‘내 안에만 머무는 사유’가 아닐 것이다. 사유가 나를 고립시키는 벽으로만 작동한다면, 그것은 개인을 지킬 뿐 세상을 잇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유가 타인을 향할 때, 벽은 다리가 된다. 내 고독에서 길어 올린 사유가 타인의 고독에 닿을 때, 우리는 서로를 이어주는 창문을 발견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벽 앞에 서서 묻는다. 나는 얼마나 두꺼운 벽을 쌓고 있는가. 그 벽에는 바깥을 향한 창문이 있는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그 창문을 통해 바람처럼 건네고 싶은 말을 적는다. 누군가에게는 지친 이마를 식혀줄 바람이 되기를, 또 누군가에게는 차가워진 가슴에 스며드는 온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롯한 고독은 나를 보존하지만, 타인을 향한 사유는 우리를 이어준다. 결국 사유는 고독의 방어벽을 넘어 흩어진 개인들을 서로 잇는 가장 오래된 다리 아닐까. 나는 그 다리를 글을 통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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