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00!”
밤늦게 들어온 딸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출석부를 부르듯 차갑게 울린다. 평소엔 이름 끝 한두 자만 따서 부르던 딸이지만, 그 순간엔 이름 석 자가 모두 불린다. 불과 두 글자가 더 붙었을 뿐인데, 분위기는 남풍에서 북풍으로 180도 달라진다. <이어령의 말>중에서
이어령 선생님은 “이름을 부를 때에는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애칭은 관계의 온도를 바꾸는 힘이 있다. 이름을 줄여 부르는 작은 습관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거리를 좁히고 마음을 묶는다.
말하기는 단순히 단어를 전달하는 일이 아니다. 목소리 톤과 말의 내용이 합쳐져야 온전히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말속에 담긴 감정은 금세 왜곡된다.
돌봄 현장에서는 이 균형이 더욱 중요하다.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 어떤 목소리 톤으로 다가가느냐가 상대의 마음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한다.
나는 휴머니튜드 강의에서 ‘애칭’을 자주 이야기한다. 치매 어르신과의 관계에서 애칭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역할을 한다. 애칭을 부르는 순간, 물리적 거리가 줄어들고 어르신의 마음도 한 뼘 가까워진다.
어르신에게 정식 이름은 병원 차트 속에 적히는 이름일 때가 많다. 그러나 가족이나 돌봄 자가 부르는 애칭은 살아온 삶의 기억, 관계의 온기를 불러낸다. 그 속에서 “나는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라는 메시지가 전해진다.
요양보호사 교재에도 어르신이 원하시는 호칭이 “심청 어르신”이라면 그대로 불러 드리라고 나온다. 단순한 존칭을 넘어 애칭에 가까운 표현이다. 가끔은 이런 질문도 받는다.
“만약 어르신이 ‘오빠!’라고 해달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지만 나는 대답한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면 충분히 존중할 수 있는 애칭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애칭의 가치는 단어 자체가 아니라 그 기능에 있다. 이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보편성을 갖지만, 애칭은 둘만이 아는 암호 같은 특수성을 가진다. 관계에서 ‘비밀을 나눈다’는 건 깊은 친밀감을 뜻하기도 한다. 애칭은 그만큼 관계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이자, 둘만이 공유하는 마음의 암호이다.
돌봄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다. 기술이나 지식보다 더 먼저 필요한 것은 감정을 존중하고 따뜻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로 서로의 온기를 맞추어가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비록 병이 그 사이를 가로막더라도, 우리는 애칭처럼 작은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애칭은 그 존중을 전하는 가장 일상적이고 친밀한 방법이다.
나에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의 비밀이 있다면, 바로 애칭이 가진 힘을 신뢰하는 것이다. 애칭 하나가 서로의 마음을 묶고, 돌봄의 자리에 따스한 공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오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 굳이 형식적인 완전한 이름이 아니라 작은 애칭으로 불러 보는 건 어떨까요? 그 짧은 호명이 생각보다 더 큰 온기를 전해줄지 모르니까요.
패랭이꽃 할매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햇살에도 수줍게 고개 숙이는
분홍빛 잎사귀 꽃이 있었다.
나는 그 꽃을 울 할매라 불렀다.
억센 바람에도 늘 내 곁에 있었고
햇살이 내리쬐는 날도 그늘이 되어주었던
단 한 사람. 울 할매
낡은 앞치마에
손때 묻은 주름이 있어도
그 웃음만은 늘 한 송이 꽃이었다.
나는 그 애칭을 부를 때마다
꽃향기가 손끝에 스미는 것 같다.
-너울
할머니 보다는 할매. 내 삶에 가장 먼저 애칭으로 다가와 준 사람이 나의 할매였다. 그 할매는 지금 내 곁에 없지만 할매를 닮은 패랭이 꽃을 만날 때 마다 난 그 향기 속에서 할매의 사랑을 그려본다.
할매가 보낸 가장 귀한 선물은 막둥이 셋째가 아닐까 싶다.
아빠는 미미미
엄마는 띠띠띠
오빠는 삐삐삐
언니는 찌찌찌
모든 식구들에게 애칭을 불러주는 아름다운 그 언향이 꼭 할매의 선물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