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잔칫날이 되면 돼지를 잡는 일이 흔했다.
소를 잡으려 했더니 “주인님, 제가 없으면 밭일은 누가 합니까?”라며 울부짖었다.
말을 잡으려 했더니 “제가 없으면 먼 길을 어찌 가시겠습니까?”라며 사정했다.
닭은 “제가 없으면 알은 누가 낳고 아침은 누가 알리겠습니까?”, 개는 “제가 없으면 집은 누가 지키겠습니까?”라며 자신의 쓰임을 호소했다.
그러나 돼지는 달랐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먹을 것을 향해 다가갔고, 결국 가장 큰 희생이 되었다.
이 이야기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저마다 주어진 쓰임이 있으며, 그 쓰임이 곧 본질을 드러낸다. 어떤 이는 분명한 사명을 찾아 살아가고, 또 어떤 이는 아직 그 길 위에 서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명을 향한 갈망이다.
사물을 셀 때 우리는 그저 개수만 헤아릴 뿐, 그 본질을 보지 않는다. ‘열 사람’이라고 말할 때, 열 개의 서로 다른 얼굴과 삶은 지워져 버린다. 이어령 선생은 “사물에도 본질이 있다”는 통찰을 남겼다. 쓰임은 곧 본질이요, 본질은 곧 사명이다.
강사로 살아오며 내가 가장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사명이다. 내가 양성하는 직업은 대부분 ‘사’로 끝난다. 전문성을 가진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마다 묻는다.
“전문가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쓰임과 본질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단어는 함부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시대가 담고, 경험이 새겨 놓은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깊이 들여다볼 때, 우리는 자신의 사명을 더 분명히 세울 수 있다.
사전은 전문가를 이렇게 정의한다.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
나는 이 정의를 다시 풀어본다.
지식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이고, 경험은 시간을 두고 반복을 통해 얻어지는 기술이다.
시험 제도는 늘 이 둘을 50:50의 비율로 요구한다.
간호사 국가고시도 그랬다. 어느 한쪽이 부족하면 과락이 되어 면허를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장은 다르다. 이론과 기술을 꼭 같은 무게로 나눌 수 없다. 그래서 늘 묻는다.
“여러분은 이론과 기술의 비율을 어떻게 조율하고 싶으십니까?”
지금까지 만 명이 넘는 수강생들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늘 같았다.
“기술이 더 풍부해야 일을 잘하지 않을까요?”
그 생각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다. 전문가에게 필요한 비율은 70:30, 이론이 기술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옳고 그름을 분별할 힘이 없다면, 그 기술은 언제든 잘못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동행서비스를 예로 들어보자.
이 서비스는 비응급 대상자에게만 제공된다.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받았다.
“우리 엄마가 병원에 가셔야 하는데, 거동이 불편해서 혼자 이동이 어렵습니다. 병원동행 매니저 한 분으로 가능할까요? 교통수단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시 정적이 흐른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고민할 여지가 없는 질문입니다. 거절해야 합니다.”
수강생들의 표정은 조금 불편해 보인다. 그 이유를 설명한다.
“‘비응급’의 반대말은 ‘응급’입니다. 거동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은 응급에 해당하며, 이 경우 119의 도움을 받거나 가족이 동행해야 합니다. 상황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힘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기술이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자격증을 취득한 뒤 이론 공부를 멈춘다.
경험이 쌓이면 기술은 익숙해지고, 그 기술이 곧 경력을 증명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진정한 전문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이론의 힘을 꾸준히 다져야 한다.
기술은 눈에 쉽게 드러나지만, 본질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깊이 묻고, 끝없이 질문해야 한다.
지겹고 어렵더라도 타협하지 않고 지켜낸 이론만이 현장에서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준다.
전문가의 사명은 쓰임과 본질에 충실하며, 상당한 지식을 갈망하고, 그 지식을 경험으로 증명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언제나 올바른 판단력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