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우울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행복’의 정의로 닿는다. 감정의 과학을 넘어, 마음의 언어로 행복을 다시 써 내려가는 시간. 그날 교실 안에는 배움보다 깊은 ‘생각의 대화’가 있었다.
노인의 우울증을 이야기할 때마다 마음의 한쪽이 묵직해진다.
그 원인은 다양하지만, 나는 종종 ‘뇌 기능의 변화’ 라는 설명 앞에서 멈추곤 한다.
우울은 단순한 기분 문제가 아니라, 뇌 속에서 감정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과 뇌의 특정 부위가 제 역할을 잃어버린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을 조절하는 시스템이 흔들릴 때, 행복·즐거움·활력 같은 감정은 제 빛을 잃는다.
나이듦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면 신체, 심리의 변화 역시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가는 것이 노년에 대처하는 현명한 지혜이다.
생활지원사 강의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누군가는 ‘마음이 편안한 상태요’라고 말했다. 또 누군가는 ‘돈 걱정 없는 상태요’라며 웃었다.
표정 속에는 진심과 바람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왜. 육하원칙으로 행복을 풀어보자고 했다.
누구랑 함께 하면 행복한가?
언제 행복한가?
어디에서 행복한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
어떻게 행복을 느끼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그것이 나에게 행복인가?
각자 나름의 언어로 그 공간을 채워가고 있었다. 이렇게 진지한 생각을 아직 해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 하는 분도 있었다.
그 질문들은 단순한 글쓰기 연습이 아니었다. ‘행복’이라는 단어 속에 각자가 가진 삶의 방향과 가치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행복은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였고, 또 다른 이의 행복은 혼자 걷는 산책길이었다. 그 작은 대답들이 모여 교실 안이 따뜻해졌다.
나 또한 내 안의 대답을 하나씩 써 내려갔다. 나는 가족과 함께 할 때 행복하다. 그리고 때로는 혼자 있을 때도 좋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으니까.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묻는다면, 나는 강의를 시작할 때, 글을 쓸 때, 그리고 그 일을 완전히 마무리할 때라고 답할 것이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일이 매듭지어지는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서 ‘됐다’는 안도와 희열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건 단순한 성취감이 아니라, 나에게 쓸모와 존재감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일을 통해 세상에 닿는다. 그 닿음이 행복의 본질이라는 것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학생들과의 수업이 끝난 뒤, 나는 한동안 칠판을 지우지 못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남아 있는 그 공간이 어쩐지 나를 지켜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감정의 호르몬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이자 의미를 찾는 훈련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강의를 정리하며 전했다.
“우울증은 뇌의 변화로 생길 수 있지만, 행복은 여전히 ‘의식적인 훈련’을 통해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감정은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육하원칙으로 행복을 풀어보던 그날, 나는 다시금 느꼈다. 행복이란 거창한 단어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인식하는 아주 구체적인 감정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