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명 Dec 15. 2023

<트랜짓>(2020)

"선생님 여기가 지옥이에요".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트랜짓>(2020)을 이렇게 압축했다. "Wir verlieben uns, hoffen, fühlen uns schuldig und finden Trost – egal wo wir sind".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희망에 들뜨고, 죄책감을 느끼고, 위안을 찾는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나는 <트랜짓>이 난민의 이야기로 치환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물론 영화에는 난민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난민의 이야기로 치환될 수는 없다. 영화의 주연은 게오르그(프란츠 로고스키 분)와 마리(폴라 비어 분)다. 그들은 난민이지만, 난민으로서 떠돌고 있지 않았다. 영화는 게오르그의 성장담이다. 게오르그는 영화 내내 어떤 것을 배웠고 얼마만큼 성장했다. 물론 그는 난민의 비애도 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민의 이야기로 치환될 수는 없다.


게오르그

  파리. 게오르그가 어느 카페에 앉아 있다. 그곳에서 그는 작가 바이델에게 두 통의 편지를 전해 달라는 지인의 부탁을 받는다. 게오르그는 마냥 퉁명스러워 보인다. 그는 지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미건조하게 묻는다. “돈은 언제 줄 건데?” 전달만 하면 바로 돈을 주겠다는 지인의 답에 게오르그는 바이델이 묵는 호텔로 간다. 그러나 바이델은 이미 자살했다. 게오르그는 온통 피칠갑인 호텔방을 보고도 무덤덤하다. 책상 위에는 여권, 원고 등 바이델의 유품이 있다. 게오르그는 그것을 챙겨 지인이 있는 카페로 돌아간다. 그런데 특공복을 입은 경찰들이 카페 바깥에 즐비하다. 파리가 봉쇄되고 있다. 게오르그는 얼른 달아나 몸을 숨긴다. 그가 몸을 숨긴 폐건물에는 어떤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게오르그는 은신처로 돌아간다. 이번에 그는 중상을 입은 그의 친구 하인츠(로날트 쿠쿨리스 분)가 마르세유로 도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지인의 부탁을 받는다. 파리에는 “봄맞이 대청소”가 한창이다. 게오르그는 하인츠를 데리고 도피길을 떠난다. 마르세유로 가는 기차에서 그는 일전에 챙겨둔 바이델의 원고를 읽는다. 페촐트의 말에 따르면 게오르그는 책을 읽어본 적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는 원고를 찬찬히 읽는다. 그곳에는 게오르그가 어렸을 때 그의 엄마가 즐겨 썼던 단어들이 있었다. 원고를 다 읽고는 바이델이 가지고 있던 편지도 읽는다. 그중 하나는 바이델의 아내로부터 온 편지였다. 편지에는 이별을 고하는 내용이 있었다. 게오르그는 문득 지인이 바이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편지를 떠올린다. 그중 하나도 바이델의 아내로부터 온 편지였다. 이번에는 재회를 요청하는 내용이 있었다. 영문 모를 일이었다.

  마르세유. 게오르그는 하인츠를 깨운다. 그런데 하인츠가 일어나지 않는다.  바깥에는 경찰들이 그득하다. 게오르그는 그대로 도망친다. 친구가 죽었다. 그래도 게오르그는 별반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는 정체성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인물이다. 게오르그는 책을 읽어본 적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도, 그리고 사랑해 본 적도 없다. 우리는 게오르그의 뿌리를 짐작할 수 없다. 게오르그가 기억하는 건 어머니뿐이다. 그것도 흔하디 흔한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즐겨 썼던 단어, 불러주었던 자장가 정도. 페촐트는 영화가 보여주어야 하는 건 인물의 변화라고 말한다. 게오르그도 페촐트의 인물로서 어떻게든 변할 것이다. 그는 마르세유에 있다. 무슨 일이든, 여기서 벌어질 것이다.


드리스

  마르세유. 게오르그는 죽은 친구 하인츠의 아내를 찾아간다. 그는 아내에게 남편의 부고를 전한다. 그러나 아내는 청각장애인이다. 옆에 있던 하인츠의 아들 드리스(릴리언 뱃맨 분)가 수화로 아버지의 부고를 통역한다. 아내는 그제야 서럽게 운다. 게오르그는 자리를 떠난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바이델은 마르세유의 멕시코 영사로부터 비자를 받았다. 게오르그는 그것을 반납하고 사례금을 받으려고 한다. 얼마간이라도 묵을 곳이 필요하다. 그런데 묵을 곳을 찾는 게 쉽지 않다. <트랜짓>의 시간적 배경에는 나치가 있다. 나치는 최신식 특공복을 입고 있지만, 분명히 나치다. 나치의 눈 밖에 난 독일인들은 고향을 떠나 프랑스로 갔지만, 나치는 이제 프랑스까지 잠식하고 있다. 마르세유로 오기 전에 게오르그는 파리에 있었다. 마르세유에서도, 그는 난민일 것이다. 게오르그는 여러 호텔을 전전하다가 일곱 번째 호텔에서 빈방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주인은 일주일치 선불을 요구한다. 그게 싫으면 비자, 승선표 따위의 서류로 여행자 신분을 입증하라고 한다. 게오르그가 묻는다. “그러니까 여기에 머무르려면 머물지 않을 걸 증명하란 얘기네요?”

  어쩔 도리가 없다. 게오르그는 일주일치 선불을 낸다. 다음날 그는 영사관으로 간다. 영사관에는 난민이 바글바글하다. <트랜짓>의 마르세유에는 체포·추방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항구가 있다. 항구에는 자유·탈출의 희망이 숨어 있다. 그 희망이 난민을 마르세유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니체는 말했다. “즉 희망은 참으로 재앙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이다. 희망은 인간의 괴로움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마르세유의 난민은 거리, 술집, 그리고 영사관에 삼삼오오 모여 있다. 역사가 그들의 발을 꽁꽁 동여매고 있다. 그래서 난민의 희망은 니체의 희망이다.  

  게오르그는 영사관에서 두 난민의 이야기를 듣는다. 한 명은 베네수엘라로 가려고 하는 지휘자, 다른 한 명은 개 두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건축가다. 지휘자는 말한다. “그들은 우리가 내려서 체류하는 걸 두려워해요. 먹을 것 좀 있어요?” 난민은 갈 곳도, 먹을 것도 없다. 게오르그도 난민이다. 그러나 그는 난민에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게오르그는 생각한다. “항구란 이야기들이 흘러 넘치는 곳이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야기할 권리가 있어. 들어줄 사람도 있어야 하고”.

  게오르그의 차례가 왔다. 게오르그는 영사를 만난다. 그는 바이델의 비자를 반납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사는 게오르그를 바이델로 오해하고 도리어 그에게 멕시코행 배편과 도피자금을 준다. 게오르그는 굳이 진실을 고백하지 않는다. 그는 바이델로서 마르세유를 떠나 멕시코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오르그는 드리스를 찾아간다. 하인츠는 게오르그의 몇 안 되는 친구였다. 모르긴 몰라도, 죽은 친구의 아들이 꽤나 신경 쓰였을 게다. 드리스는 독일 유명 축구 클럽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팬이다. 게오르그는 드리스에게 축구공을 선물한다. 그는 드리스의 고장 난 라디오도 고쳐준다. 게오르그와 드리스는 함께 라디오를 듣는다. 그런데 낯익은 음악이 게오르그의 귀에 들린다. “이 노래 알아. 엄마가 잘 때 불러줬었거든”. 게오르그는 드리스에게 그 노래를 불러준다. 그러다 멈칫한다. “갑자기 뭔가 울컥했다. 그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일도 게오르그는 드리스를 찾아간다. 게오르그와 드리스는 한참 시간을 보낸다. 게오르그는 드리스를 앉혀두고 잠깐 영사관에 들른다. 그가 영사와 짧은 면담을 마치고 나왔을 때 드리스가 묻는다. “떠나고 싶어요? 미국으로?” 게오르그가 답한다. “아니, 멕시코로”. 드리스는 울고 있다. “모두 다 가버려요!” 그는 게오르그를 밀쳐내고 멀리 뛰어간다. 드리스는 천식을 앓고 있다. 게오르그는 드리스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 의사를 데려간다. 그러나 드리스는 게오르그를 외면한다. 의사가 말한다. “산에 같이 안가요? 아빠 대신 당신이 같이 가길 원했어요”.

  게오르그도, 드리스도 난민이다. 그러나 게오르그는 비자가 있고, 배편이 있으며, 돈이 있다. 그런데 드리스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게오르그는 마르세유를 떠날 수 있겠지만, 드리스는 그럴 수 없다. 기껏해야 드리스는 산으로 도망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게오르그를 사랑한다. 그래서 드리스는 멕시코로 떠나고 싶다는 게오르그가 무척 미웠을 게다. 게오르그도 드리스를 사랑했다. 물론 그는 알지 못했다. 의사가 말한다. “당신은 분명 그 애를 사랑해요. 그 애 방에 못 들어오게 하니 속상해하는 걸 봤어요. 그 애를 사랑하면서 버리려 해요”. 게오르그는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처음 음미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 죄책감 같은 것.


마리

  마르세유. 게오르그는 어떤 여자를 여러 번, 우연히 만난다. 그 여자는 바이델의 아내이고, 드리스를 치료했던 의사의 연인이다. 게오르그가 그것을 알게 된 건 나중 일이다. 그가 의사를 찾아갔을 때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게오르그는 처음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자는 의사와 마르세유를 떠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작 닻이 올라가자마자 배에서 내렸다. 남편 때문이었다. 여자는 묻는다. “누가 먼저 상대를 잊을까요? 떠난 사람일까요? 남겨진 사람일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그 여자의 사정은 이랬다. 여자는 파리에서 남편에게 이별 편지를 쓰고 마르세유로 왔다. 그런데 그녀는 마르세유에서 남편에게 다시 재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여자는 줄곧 남편을 기다렸다. 그녀는 영사관에서 남편이 마르세유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남편은 여자를 찾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거리, 술집, 그리고 영사관 어디에서든 남편을 찾았다. 게오르그가 그 여자를 여러 번, 우연히 만났던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여자는 어디에서도 남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가 말한다. “항상 한발 늦어요. 남겨진 사람은 상대를 못 잊는다는데 그렇지 않나 봐요. 그들에겐 슬픈 노래가 있고 동정의 눈길이 쏟아지죠. 떠난 사람에겐 아무것도 없어요. 노래도 없어요”.

  게오르그가 말한다. “당신을 잊지 않았을 거예요”. 그는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는 마리다. 그녀가 찾는 남편은 바이델이다. 바이델은 진작 죽었다. 그러나 게오르그가 바이델의 신분을 빌린 탓에 그의 흔적이 마르세유에 남았다. 그래서 그는 마리의 구원자가 되기로 했다. “제가 돌봐드릴게요”. 마리가 묻는다. “당신은 누구죠?” 게오르그는 답하지 않는다. 의사가 돌아왔다. 게오르그는 말한다. “마리의 멕시코 비자와 승선표를 구할 수 있어요. 먼저 가 계세요. 제가 마리와 뒤따라 갈게요. 23일, 몬트리올 호예요”.

  게오르그가 마리의 구원자가 되기로 한 건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는 바이델의 신분을 빌리고 있었다. 진실을 고백할 때 비로소 게오로그는 죄책감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바이델이 가지고 있던 건 이별 편지였다. 재회 편지는 게오르그가 가지고 있었다. 바이델은 이별 편지를 읽고 자살했다. 마리가 진실을 알았을 때, 죄책감이 그녀를 파멸로 이끌 게 뻔했다. 안 그래도 그녀는 바이델을 떠났다는 죄책감으로 마르세유를 떠돌고 있었다. 게오르그는 죄책감을 배웠다. 드리스 덕분이었다. 마리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게오르그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답할 수 없었다.


  의사가 먼저 마르세유를 떠났다. 마리는 웃고 있다. 그녀는 게오르그를 끌어당기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 말한다. “당신과 같이 안 가요. 여기 있을 거예요”. 게오르그는 당황한다. “그럼 우리가 여태 한 일은 뭐죠?” 사실 마리는 의사가 떠나기를 바랐을 뿐이다. 의사는 멕시코에 병원을 짓고 있었다. 마리는 의사가 멕시코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게오르그가 묻는다. “난 남편을 찾아야 해요”. 마리가 답한다. “마리… 당신 남편은 죽었어요”. 게오르그는 말할 수 있는 진실만을 고백한다. 그러나 마리는 믿지 않는다. “아니, 그럴 리 없어요”.

   “그는 누워서 생각했다. 며칠이면 떠난다고”. 게오르그는 떠날 날만 기다린다. 며칠간은 방에만 있었다. 전날 밤이 되었다. 게오르그는 짐을 꾸리고 식당으로 간다. 그런데 마리가 들어온다. 그녀는 게오르그를 껴안는다. 마리는 다시 마르세유를 떠나겠다고 말한다. 게오르그는 마리를 호텔로 데려온다. “그는 거울 앞에서 그녀의 남편인 불운한 작가를 떠올렸다. 모든 걸 말하고 싶었다”. 마리가 진실을 알았을 때, 죄책감이 그녀를 파멸로 이끌 게 뻔하다. 그래도, 그러면 마르세유를 떠날 수 있지 않으려나. 게오르그는 마리를 사랑하고 있다. 떠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내일이면 알 수 있을 테다.  

  날이 밝았다. 게오르그와 마리는 항구로 간다. 그런데 마리는 내내 남편 이야기를 한다. 사실 그녀가 다시 마르세유를 떠나기로 한 건 남편이 멕시코행 몬트리올 호에 탈 거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멕시코 영사가 말해준 소식이었다. 당연히 그 소식은 게오르그의 흔적이었다. 게오르그는 말할 수 있는 진실만을 다시 고백한다. 그러나 마리는 여전히 믿지 않는다. “그는 올 거고 날 용서할 거예요. 그를 잘 알아요. 웃으며 용서하겠죠”. 게오르그는 차에서 내린다.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의사는 먼저 마르세유를 떠났었지만 사소한 문제로 다시 돌아왔다. 게오르그는 의사에게 자신의 배표를 준다.

  

  게오르그는 결국 마르세유를 떠나지 못했다. 처음 그가 마리의 구원자가 되기로 한 건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게오르그는 마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바이델의 신분을 빌려 바이델 자신, 그러니까 마리의 남편이 되려고 했다. 멕시코 영사와의 면담에서 게오르그가 작가로서의 신념을 토로하고, 직접 소설을 짓기도 했던 건 단순한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게오르그의 희망은 난민의 희망이었고, 니체의 희망이었다. 게오르그가 바이델 자신이 되려면 바이델의 신분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고는 그는 멕시코행 몬트리올 호에 탈 수 없었다. 하지만 게오르그가 바이델의 신분을 빌릴수록 그의 흔적이 마르세유 여기저기에 남았다. 마리는 그 흔적을 쫓아다녔으므로, 그녀는 남편이 죽었다는 최소한의 진실조차 믿을 수 없었다. 바이델은 분명히 마르세유에 있었다. 마리는 바이델을 떠났다는 죄책감으로 마르세유를 떠돌았다. 그녀는 줄곧 남편에게 용서를 빌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리의 희망도 난민의 희망이었고, 니체의 희망이었다. 바이델은 진작 죽었고, 마리가 찾는 남편은 게오르그였다.


  게오르그는 죄책감으로 마리를 사랑했고, 마리는 죄책감으로 바이델을 사랑했다. 마리가 게오르그를 사랑하려면 그가 바이델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게오르그가 바이델이 되려고 할수록, 그는 또 다른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게오르그는 그렇게 바이델로부터, 마리로부터 멀어져 갔다. 게오르그의 희망도, 마리의 희망도 난민의 희망이었고 니체의 희망이었다. 마르세유에 남은 게오르그는 마리가 탄 배가 폭침으로 침몰했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그는 오매불망 마리를 기다린다. 게오르그는 길에서 마리를 보고, 식당에서 우리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어떤 여자를 보고 웃는다. 이제는 게오르그가 마리다.  

  니체는 다시 말한다.


“희망—판도라는 갖가지 재앙이 가득 차 있는 상자를 가져와서 열었다. 이것은 신들이 인간에게 주는 외관상 아름답고 매력적인 선물이며 ‘행복의 상자’라고도 불렸다. 그러자 상자 속에서는 모든 재앙이, 날개가 달린 살아 있는 것들이 튀어나왔다. 그때부터 이것들은 내내 헤매기 시작했고 낮이나 밤이나 인간에게 해를 끼쳐 왔다. 그러나 상자 속에는 단 하나의 재앙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때 판도라는 제우스의 뜻에 따라 뚜껑을 닫았다. 그래서 그 재앙은 그 속에 남게 되었다.

인간은 영원히 행복의 상자를 집 안에 간직한 채 어떤 보물이 그 속에 들었는지 궁금해한다. 그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욕심이 날 때면 거기에 손을 뻗쳐 본다. 왜냐하면 인간은 판도라가 가져온 그 상자가 재앙의 상자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다만 남아 있는 재앙이 행복의 최대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보물이란 바로 희망이다. 곧 제우스는 인간이 그 이외의 심한 재난에 괴로움을 받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시키면서 계속 새로운 괴로움 속에 잠길 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에게 희망을 준 것이다. 즉 희망은 참으로 재앙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이다. 희망은 인간의 괴로움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천당과 지옥은 저기도 있고, 여기도 있다. 천당에서 희망은 희망이고, 지옥에서 희망은 재앙이다. 게오르그는 영사관에서 두 난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명은 베네수엘라로 가려고 하는 지휘자, 다른 한 명은 개 두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건축가였다. 지휘자에게는 마르세유를 떠날 수 있는 충분한 서류가 있었고 베네수엘라는 일자리도 있었다. 그러나 지휘자는 기다리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건축가에게는 개 두 마리가 마르세유를 떠날 수 있는 보증서였다. 건축가는 유대계 미국인의 부탁을 받고 개를 돌보고 있었다. 그 미국인이 건축가의 비자를 받아주기로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개가 죽었다. 개 없이 건축가가 마르세유를 떠날 도리는 없었다. 그래서 건축가는 기다리다가, 마르세유의 건축물에서 떨어져 죽었다. 두 난민에게 희망은 재앙이었다. 그들에게 마르세유는 지옥이었다.

  <트랜짓>은 어느 바텐더를 화자로 내세운다. 그 바텐더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놓은 건 게오르그다. 게오르그는 처음 두 난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항구란 이야기들이 흘러 넘치는 곳이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야기할 권리가 있어. 들어줄 사람도 있어야 하고”. 난민은 말하는 사람이었고, 게오르그는 듣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게오르그는 이제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난민이다.

  게오르그는 마르세유에서 사랑, 죄책감 같은 것을 배웠다. 그는 그렇게 마리가 되었고, 마리라는 망령을 기다린다. 난민이 자유·탈출의 희망을 기다리는 것처럼. 게오르그는 이제 난민의 희망, 니체의 희망을 배울 것이다. 멕시코 영사가 물었다. “가장 최근작이 뭔가요?” 게오르그가 답했다. “한 남자가 죽었어요. 지옥행이 결정되었지요. 그는 큰 문 앞에서 기다렸어요.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1년, 2년. 마침내 누가 지나갔어요. 남자는 말을 걸었어요. 절 좀 도와주세요. 지옥 가기로 돼 있거든요. 그 사람은 남자를 훑어보더니 말해요. 선생님 여기가 지옥이에요”. 난민에게 마르세유는 지옥이었다. 게오르그는 벌써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희망에 들뜨고, 죄책감을 느끼고, 위안을 찾는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설령 그곳이 지옥일지라도.

작가의 이전글 <파이터>(201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