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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 Dec 23. 2023

<팬텀 스레드>(2018)

"레이놀즈는 내 꿈을 이뤄줬어요. 대신 난 그가 열망하는 걸 줬죠".

  두 가지 각인이 좀체 지워지지 않는다. 하나.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의 우아함. 레이놀즈가 알마(빅키 크리엡스 분)를 처음 만났던 런던의 교외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의 그 분위기. 물론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용모가 빼어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굳이 빼어난 용모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얼마든지 우아할 수 있다. 말로 다하기 어려운 분위기라는 게 있다. 그래도 빼어난 용모는 그 분위기를 몇 곱절로 부풀리기도 한다. 자, 각설하고, 둘. 레이놀즈의 야수성. 레이놀즈가 차를 몰 때의 그 속도감. 그는 굶주린 짐승같이 페달을 밟았다. 그런데 툭툭 불거지는 레이놀즈의 야수성이 그의 우아함과 상충하고 있었다.

  하나 더하기 둘, 그래서 셋. 이질감. 나는 <팬텀 스레드>(2018)를 보는 내내 그 이질감을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이물감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레이놀즈에게는 어떤 비밀이 있었다. 나는 내 멋대로 그 비밀을 말하려고 한다. <팬텀 스레드>는 알마의 회상이다. 그녀의 회상은 이렇게 시작한다. “레이놀즈는 내 꿈을 이뤄줬어요. 대신 난 그가 열망하는 걸 줬죠”. <팬텀 스레드>를 관통하는 건 다시 두 가지다. 하나. 알마의 꿈. 둘. 레이놀즈의 열망.

  알마는 이민자 출신 웨이트리스였다. 레이놀즈는 우연히 그녀가 일하던 식당에 들렀고, 알마를 만났다. 그는 알마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게 사랑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레이놀즈는 알마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알마는 그 초대에 응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쪽지 하나를 레이놀즈에게 남겼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배고프신 손님. 제 이름은 알마예요’. 알마도 레이놀즈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게 사랑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알마의 볼은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연지볼은 왠지 발칙하게만 보였다.

  첫 데이트에서 레이놀즈는 알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건 그의 이야기였지만, 어머니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캔버스 천 속엔 뭐든지 꿰매 넣을 수 있죠. 비밀, 동전, 글귀, 쪽지. 어릴 때부터 난 옷의 솔기에 뭔가를 숨기곤 했소. 나만의 비밀스러운 것들을…. 가슴께엔 어머니 머리칼을 넣어두고 늘 그녀의 숨결을 느끼죠. 대단한 분이셨소. 일도 어머니께 배웠지. 그래서 늘 그분을 생각하며 살죠”.


  레이놀즈에게는 어떤 비밀이 있었다. 레이놀즈의 어머니는 죽었다. 물론 비밀은 그게 아니다. 레이놀즈는 어머니의 죽음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가슴께엔 어머니 머리칼을 넣어”뒀다는 레이놀즈의 고백은 사뭇 섬찟하다. 그런데 다시, 비밀은 그게 아니다. 레이놀즈는 내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나 알마는 영민한 여자였다. 얼마간의 대화로 그녀는 레이놀즈의 비밀을 알아차렸다. 알마는 말했다. “그냥 강한 척하시는 거 같은데”.

  알마와 레이놀즈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눈싸움에서 백거먼 게임까지, 알마와 레이놀즈 사이에는 이런저런 게임이 있다. 정작 중요한 건 사랑이라는 게임이다. 사실 어떤 관계든 게임 비스무리한 꼴을 하고 있다. 한 명이 이기고, 한 명은 진다. 윈윈게임은 흔치 않다.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 명이 더 사랑하고, 한 명은 덜 사랑한다. 그런데 재밌는 건 갑을이 엎치락뒤치락 바뀐다는 거다. 승부를 결정짓는 건 기세다. 상대가 바라는 걸 재빨리 알아차리는 기민함만이 기세를 얻는다. 소망의 뒷면에는 나약함이 있다. 결국 상대의 나약함을 쥐고 흔드는 사람이 사랑 게임의 승자가 된다. 그래서 알마와 레이놀즈의 사랑 게임의 승자는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이놀즈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알마는 들려주지 않았다. 소망, 나약함 따위를 말한 건 레이놀즈였다. 니케는 알마를 보고 웃고 있었다.

  “알마도 레이놀즈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게 사랑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말한 “사랑”은 낭만적 사랑이었다. 낭만적 사랑을 정의하는 건 지난한 일이다. 나는 대강만을 설명할 수 있다. 낭만적 사랑은 감성적 사랑이다. 그러니까, 상대의 이용 가치가 있든지 없든지, 곁에 두고 삶의 반려로 삼는 것.


  알마는 이렇게 회상했다. “난 날 별로 안 좋아했어요. 너무 넓은 듯한 어깨에 목은 새 모가지처럼 가늘고 가슴은 납작하고 엉덩이는 필요 이상으로 크고 팔뚝은 굵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의 작품 속의 난 완벽하고 당당하죠”. 알마는 이민자 출신 웨이트리스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별반 가진 게 없었다. 낮은 자존감은 유별난 게 아니었다. 레이놀즈는 드레스 디자이너였다. 지역 유지에서 벨기에 공주까지 레이놀즈를 찾아왔다.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레이놀즈의 부와 명예를 짐작케 했다. 레이놀즈의 드레스는 알마의 자존감을 회복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알마는 그의 모델이 되려고 했다. 그게 낭만적 사랑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알마는 레이놀즈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 그의 누나 시릴(레슬리 맨빌)은 말했다. “이상적인 몸매를 갖고 있네”. “쟨 뱃살 있는 걸 좋아해요”. 그러나 기약 있는 계약이었다. 알마가 있기 전 어떤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도 레이놀즈의 모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해고당했다. 레이놀즈의 모델은 일면만 연인이었고, 말 그대로 모델이었다. 그래서 레이놀즈는 해고 비슷하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는 그 여자에게 드레스 하나를 선물했다. 퇴직금 조였다. 그 여자가 사랑을 갈구했다는 게 해고 사유였다. 계약과 해고의 역사는 제법 길었을 것이다. 레이놀즈는 알마를 이번 후임자로 정했다. 알마도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었다. 그녀가 사랑을 갈구할 때, 언제든.

  그런데 왜. 사랑을 갈구하는 게 무슨 죄라고. 레이놀즈에게는 어떤 비밀이 있었다고 말했다. 레이놀즈의 어머니는 두 번째 결혼으로 레이놀즈를 떠났다. 어머니의 사정은 명확히 알 수 없다. 사정이 무엇이든, 레이놀즈에게 어머니의 재혼은 상실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존재는 무겁디무거운 법이다. 어머니는 레이놀즈에게 삶을 알려주었다. 인간은 태어나서, 일하다가, 죽는다. 어머니는 레이놀즈를 낳았고, 바느질을 알려주었으며, 그를 떠났다. 삶을 알려주었던 어머니가 떠났을 때, 레이놀즈는 또 하나를 배웠을 것이다. 나약함이라는 죄에 관하여.

  레이놀즈는 역사적 인간이었다. 그는 날 때부터 함께 살아온 누나를 이제는 “늙은 누나”라고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었고, “아침 식사 때 삐끗하면 그날 하루를 망”치는 인간이었으며, 유행을 “더러운 단어”라고 멸시하는 인간이었다. 레이놀즈의 시계는 아침에 멈춰 있었다. 그러니까, 16살 소년일 때에. 그래서 레이놀즈는 날마다 해껏 일했다. 알마는 이렇게 회상했다. “가끔 우린 새벽 4시에 깨요. 전날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어도…. 그래도 그는 쌩쌩하죠. 그리고 전 하염없이 기다려요. 저처럼 잘 기다리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레이놀즈에게 나약함은 죄였다. 레이놀즈는 16살 소년의 죄를 대속하는 마음으로 일했다. 그래서 모델이 사랑을 갈구할 때, 그는 가차 없이 모델을 해고했다. 레이놀즈는 그렇게 부와 명예, 으리으리한 대저택 따위를 얻었다. 숲 속의 대저택에서 레이놀즈는 왕이었고, 모든 건 왕의 규율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레이놀즈는 말했다. “이 집엔 고요한 죽음의 기운이 흘러. 이 냄새가 난 너무 싫어”

  니체는 말했다. “또는 좀 더 단순하게 내 주제를 설명한다면,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 니체에게 영원한 기억은 질병이다. 니체는 기억과 고통에는 불가분적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달구어 찍어야 한다.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이것은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유감스럽게도 가장 오래 지속된) 심리학의 주요 명제이다”. 기억과 고통의 불가분적 관계는 자기 보존의 맥락에서 유용할 수 있다. 유기체가 어떤 위기에서 비롯된 고통을 분명히 기억할수록 다음 위기에서 목숨을 보존할 확률은 높아진다. 그러나 영원한 기억은 자기를 보존하기보다는 도리어 파괴하는 또 다른 위기를 초래하고 만다. 트라우마 환자의 안타까운 선택들이 그걸 증명한다.


  레이놀즈는 으리으리한 대저택의 왕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저주받은 대저택이었다. 레이놀즈는 그곳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16살 소년의 고통이 영원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탓이다. 레이놀즈는 자신이 제작한 드레스의 솔기에 쪽지 하나를 숨겨두었다. ‘너는 저주받지 않았다’. 레이놀즈는 옷의 솔기에 비밀스러운 것들을 숨기곤 했다고 말했다. 그가 스스로 내린 저주는 강인함에 대한 집착이었다. 레이놀즈는 그 자발적 저주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놀즈는 날마다 해껏 일했다. 어떤 이야기에서든, 저주는 결자해지의 원리를 벗어나 있다. 그래서 저주받은 인간은 구원자를 기다리는 법이다.

  레이놀즈의 자발적 저주, 그러니까 강인함에 대한 집착에서 레이놀즈를 해방시킬 수 있는 구원자는 무엇보다 강인해야 마땅했다. 돌이켜 보면 오래 레이놀즈의 곁에 있었던 사람은 대개 그랬다. 벨기에 공주, 시릴 같은 사람들. 레이놀즈와 시릴이 한번 말다툼을 한 일이 있었다. 시릴은 말했다. “나와 싸우면 넌 살아남지 못해. 이 마룻바닥에 쓰러지는 건 너라고. 알겠니?” 레이놀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힘의 크기를 알고 있었다. 레이놀즈는 말했다. “시릴의 말은 늘 맞지”. 시릴은 레이놀즈보다 강인했다. 그러나 그녀는 레이놀즈를 구원하지 못했다. 모르긴 몰라도, 강인함은 구원자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닌듯했다.

  레이놀즈를 구원한 건 알마였다. 알마는 영민한 여자였다. 레이놀즈는 언제나처럼 알마에게도 자신의 강인함을 증명하려 했다. 어쨌든 알마는 영민했다. 그녀는 레이놀즈의 고압적 말투에 주눅 들지 않았고, 그의 드레스를 더럽히는 여자를 못 견뎌했으며, 그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놀즈의 시험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레이놀즈는 알마를 어여삐 여기다가도 사소한 문제로 벌컥 화를 냈다. 레이놀즈의 양가성은 불가해했지만, 그가 화를 내는 순간에는 어떤 교집합이 있었다. 알마가 레이놀즈만을 위한 식탁을 차렸을 때, 레이놀즈는 심사가 뒤틀린 티를 내고 있었다. 아스파라거스를 버터에 졸였다는 건 표면적 이유에 불과했다.


  “대체 뭣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거야? 네가 필요 없는 존재 같아서 그래?” 레이놀즈가 물었다. “네”. 알마가 답했다. “필요 없어”. 레이놀즈가 말했다. “예상했던 대답이네요. 강한 척 마요. 당신은 강하지 않아”. 알마가 말했다. “그래, 맞아 맞다고. 내가 날 안 지키면 누군가 한밤중에 나타나 내 자릴 차지하고 앉아 아스파라거스를 내놓으라고 할 거야!” “소중한 내 시간에 이게 뭐야?” 레이놀즈가 말했다.  

  레이놀즈는 날마다 해껏 일했다고 말했다. 낭만, 사랑 따위는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레이놀즈가 연인 겸 모델을 두는 건 그가 어쩔 수 없는 남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놀즈는 남자이기 전에 드레스 디자이너였고, 드레스 디자이너이기 전에 16살 소년이었다. 첫 데이트에서 알마는 레이놀즈에게 물었다. “근데 왜 결혼 안 하세요?” 레이놀즈는 답했다. “난 드레스를 만들어요”. 얼핏 동문서답으로 보일지 몰라도, 레이놀즈의 비밀을 알고 보면 분명해진다.

  그러나 레이놀즈는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놀즈가 연인 겸 모델을 두는 건 그래서였을는지도 모른다. 알마는 영민한 여자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레이놀즈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그 비밀을 단서로 레이놀즈를 추적했다. 알마는 말했다. “당신의 규칙과, 이 집구석과, 사람들과, 돈과, 이 옷들과, 모든 게 다 게임이라고! 이곳의 모든 건 다 비정상적이고 부자연스러워. 모든 게 게임이라고!” 알마는 레이놀즈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는 게임의 승자가 되어야만 했다.

  강인한 사람은 오래 레이놀즈의 곁에 있을 수는 있어도 그의 구원자는 되지 못했다. 결국 상대의 나약함을 쥐고 흔드는 사람이 사랑 게임의 승자가 된다고 말했다. 알마는 강인함에 집착하는 레이놀즈의 나약함을 알고 있었다. 물론 나약함은 가시적이지 않았다. 레이놀즈는 늘 강인함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 있었다. 알마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사람처럼 자기 일을 사랑하고 그 일에 모든 걸 쏟아부으면, 가끔 한 번씩은 무너지게 되나 봐요. 그럴 때 그는 아기가 돼요. 어리광 부리는 아기. 그럴 때 그는 연약한 존재가 되죠. 무방비 상태의…”. 다시, 알마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가끔 일상의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어요”. 알마의 손에는 독버섯이 들려 있었다.

  레이놀즈가 스스로 내린 저주는 강인함에 대한 집착이었고, 그는 그 자발적 자주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놀즈는 날마다 해껏 일해야 했다. 그러니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레이놀즈는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든 레이놀즈 대신 그를 멈춰줄 수 있는 사람. 알마는 독버섯을 빻아 가루를 내 찻잔에 부었다. 그녀는 그 찻잔을 레이놀즈에게 가져갔다. 레이놀즈는 차를 마셨다. 알마는 그렇게 레이놀즈의 구원자가 되었다. 박찬욱 식으로,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쯤. 레이놀즈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제작한 드레스 위로 쓰러졌다. 레이놀즈의 구두약이 드레스에 묻었다. 드레스는 저주의 산물이었다. 레이놀즈는 독이 든 차를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그걸 더럽힐 수 있었다.

  레이놀즈는 말했다. “나 무서워, 알마”. 알마가 말했다. “네, 그럴 거예요”. “내가 잘 돌봐줄게요”. 방 한 켠에 레이놀즈의 엄마가 있었다. 알마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사라졌다. 알마는 이렇게 회상했다. “2, 3일 지나면 다시 괜찮아져요”. 레이놀즈는 금방 몸을 추슬렀다. 그리고 그는 가장 먼저 알마에게 청혼했다. “당신이 날 이 어둠에서 건져줘. 이 저주를 깨줘. 변화가 없는 집은 죽은 집이야. 나와 결혼해 주겠어?”  

  알마는 레이놀즈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여전히 레이놀즈는 알마를 어여삐 여기다가도 사소한 문제로 벌컥 화를 냈다. 그러나 달라진 게 있었다. 알마는 레이놀즈에게 새해맞이 무도회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레이놀즈는 일하고 있었다. 그는 당연히 거절했다. 알마가 떠났다. 그런데 레이놀즈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일을 하다가도 곰곰 생각에 잠기고, 문 앞을 서성이기도 했다. 레이놀즈는 결국 알마를 찾아갔다. 레이놀즈에게 알마는 더 이상 연인 겸 모델이 아니었다. 그녀는 레이놀즈의 부인이었고, 구원자였다.

  레이놀즈는 시릴에게 말했다. “일을 못하겠어. 도저히 집중이 안 돼. 자신감도 없고…. 걘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 우리 둘이 일군 이 의상실을 걔가 다 망치고 있어. 나도 망치고 있어. 누나와 멀어지게 만들고! 걔가 온 뒤로 우리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 저주는 끈적끈적 떨어지지 않는다. 알마는 레이놀즈의 토로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독버섯을 버터에 졸이고, 계란물을 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난 당신이 쓰러져주길 원해요. 힘없이, 나약하게, 무방비 상태로, 내 도움만 기다리며…. 그리곤 다시 강해지길 원해요. 죽진 않을 거예요. 당신이 죽고 싶어도 안 죽을 거예요. 당신은 좀 쉬어야 돼요”. 레이놀즈는 독버섯 오믈렛을 꼭꼭 씹어 삼켰다. 그리고는 말했다. “키스해 줘. 쓰러지기 전에”. 레이놀즈는 알마를 사랑하고 있었다.

  알마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가 이번엔 못 깨어나도, 내일 여기에 없다 해도 상관없어요. 우린 다시 만날 테니까. 저승에서든 어느 별에서든 만날 테니까요.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또 그다음 생애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기다리기만 하면 우린 또 만날 거예요. 그를 사랑하면 인생의 모든 게 다 아주 확실해지죠”. 알마도 레이놀즈를 사랑하고 있었다.

  <팬텀 스레드>를 관통하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 알마의 꿈. 둘. 레이놀즈의 열망. 불확실성의 세계를 벗어나는 게 알마의 꿈이었다. 알마는 이민자 출신 웨이트리스였고, 별반 가진 게 없었으며, 자존감이 낮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레이놀즈를 만나기 전, 알마의 세계는 알래야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레이놀즈는 알마를 다른 세계로 데려갈 수 있었다. 알마는 레이놀즈를 찾아온 벨기에 공주에게 말했다. “전 여기 살아요”.


  강인함에 대한 집착, 그 자발적 저주에서 해방되는 게 레이놀즈의 열망이었다. 그래서 레이놀즈는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알마에게 말했다.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찾아 헤맨 느낌이오”. 알마가 레이놀즈의 구원자였다. 그녀는 레이놀즈를 멈춰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버섯은 남근의 상징이므로 남성성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독버섯은 왜곡된 남성성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강인함에 대한 집착은 왜곡된 남성성이다. 그래서 레이놀즈를 병들게 하고, 또 치유했던 독버섯은 사뭇 상징적이다.


  글이 길었다. 그러나 의문은 남았다. 레이놀즈와 알마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을까. 나는 처음에는 의심했고, 나중에는 확신했다. 사랑이었다. 그래도 어떤 이질감, 이물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만, 그래서 나는 다시 확신했다. 사랑이었다. 사랑은 정복되지 않았다. 사랑을 소재로 한 글이 여태껏 쓰이고 있다는 게 그걸 증명한다. 레이놀즈의 야수성이 그의 우아함과 상충하고 있었듯, 알마의 순수함이 그녀의 발칙함과 상충하고 있었듯, 사람도 사랑도 양가적이다. 그래서 사랑은 정복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레이놀즈는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정말 그랬나. 모를 일이다. 잡설 끝에 남는 건 하나다. 글이든 영화든, 무언가 보고 배운다는 건 이질감, 이물감을 사랑하는 연습에 다름 아니다.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사람이든 사랑이든 지킬 수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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