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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 Dec 31. 2023

<평양랭면>(2021)

실패 2

“옥류관 수석 주방장 철중(백일섭 분)은 남한에 동생을 둔 이산가족이다. 이번 생에 다시 만나기는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2018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남측이 요청한 평양냉면을 직접 만들기 위해 파견된다. 때마침 동생도 남측 수행원으로 참석한다는 걸 알게 된 철중은 동생이 꿈에도 잊지 못하는 어머니의 맛이 담긴 평양냉면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판문점으로 향한다”.

  <평양랭면>(2021)은 25분짜리 단편영화다. 깜찍한 역경이 있긴 해도, 철중은 동생에게 평양냉면을 만들어주고야 만다. 철중의 서사가 특출 날 건 없다. 눈에 들어왔던 건 백일섭이라는 배우다. 내가 기억하는 백일섭은 <엄마가 뿔났다>(2008)의 나일석이었는데, 언제 이만큼 주름이 잡히셨는지. 그래, 13년이라는 시간은 그만큼 길었지. 하긴, 2008년, 나는 할아버지 옆에서 드라마를 보는 중학생이었다. 2023년, 할아버지는 죽었고 나는 더 이상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이 덧없음이라는 게, 그러니까 늙는다는 게, 매일 같이 지지고 볶는 얼굴들로는 도통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명멸하는 얼굴들은 그래서 소중하다.

  어쨌든 나는 백일섭이라는 배우를 말하고 싶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곰 아저씨, 그런데 방금 내가 보았던 곰의 주름, 그 주름을 더 굴곡지게 했던 빛에서부터 배우의 주름으로. 쓸 수 있었는데 쓰지 못했다. 12월 27일의 술자리 때문이었다.


  연말의 술자리는 클리셰다. 27일의 술자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해 질 무렵 만나기로 했고, 나는 약속장소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카뮈의 『페스트』. 거의 다 읽었는데 휴대폰이 번쩍거렸다. 평소 같으면 못 본 척 책장을 넘겼겠지만, 그날은 갈 곳이 있었다. 신소리만 늘어놓는 단체 채팅방에서 어떤 기사가 공유되고 있었다. 이선균이 자살했다. 가짜 뉴스잖아. 포털사이트가 똑같은 기사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니었다. 구태여 기사를 읽지는 않았다. 사람이 죽으면 말들이 부딪친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배우일 때, 부딪치는 건 말들이 아니라 소리다. 개는 귀에 익은 소리에는 짖지 않는다. 나는 짖지 않을 터라 읽지 않았다.


  약속 시간이 되었다. 27일의 술자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나 다른 건 그날 이선균이 자살했고, 그는 유명 배우였으며, 석연치 않은 사건에 휘말려 있었다는 것뿐이다. 나는 그날 처음 그 사건을 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게 내 소회였다. 나는 그날 금방 술에 취했다. 술을 곧잘 마시는데도 가끔 그런 날이 있다. 2차였던가 3차였던가, 나는 몰래 집으로 달아났다. 대개 가장 술값이 센 1차를 계산해서 그런지 미안함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음악을 들었다. 술에 절어 있을 때 음악을 들으면 가사보다는 선율이 먼저 들린다. 어떤 음악이든 가사를 먼저 듣는 나에겐 기분 좋은 일탈이다. 나는 그날 부활의 <소나기>를 들었다. 이상하게도 가사가 귀에 박혔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새벽 운동을 하러 갔다. 몸에 무게가 실릴수록 숨은 가빠진다. 가쁜 숨을 쉴수록 내장에 똬리 틀은 취기가 달아난다. 어제의 무모함을 속죄하는 데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벤치에 앉아서 신발끈을 풀었다. 대형 스크린에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이선균이 자살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스크린 쪽으로 눈을 팔고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갔다. 할머니가 뉴스를 보고 있었다. 십분 전의 그 뉴스였다. 어떤 생각들이 엉키기 시작했다. 이선균은 참 명망 높은 배우였다, 세상이 얼마쯤 시끄럽겠다, 듣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겠다, 괜히 마음이 언짢다, 며칠 뒤면 새해가 올 텐데.


  27일에 이선균이 자살했고, 발인은 29일이었다. 그때 내 슬픔의 몫은 없었다. 27일에 술자리가 있었고, 오늘은 31일이다. 오늘 내 슬픔은 폐를 끼치지 않을 테다. 나는 이선균이 아닌 배우만을 말하려고 한다. 배우의 사라짐, 딱 그것만.


  사르트르는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킨 혹은 무질서와 천재』를 각색해 『킨』을 썼다. 겉으로는 사랑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배우 킨, 킨의 연기에 매료돼 그를 사모하는 엘레나 부인, 연극을 향한 열정으로 파혼까지 결심하고 킨을 따르는 배우지망생 안나, 킨의 친구로서 사교계의 유희를 함께 즐기면서도 킨과 엘레나의 관계를 방해하는 웨일즈 공. 그러나 사르트르는 뒤마의 원작을 각색함으로써 배우의 존재론을 고찰했다고 말했다. 엘레나가 묻는다. “도대체 배우가 뭔데요?” 웨일즈 공이 답한다. “그건 신기루죠”. 『킨』 안쪽에는 배우, 그 비현실적 존재의 존재론이 있다.


  킨은 배우다. 그는 배우로서의 자신을 이중적으로 평가한다. 킨은 배우의 명예를 찬양하다가도 오욕한다. “그렇습니다. 나는 또 다시 거짓된 상황에 빠져있지만, 어쩌겠습니까, 이게 직업인데. 나는 거짓된 상황들을 살아가야 하거든요”. 그 이중성은 사실 관객의 이중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신들은 경탄과 경멸 사이에서 나를 찢어놓고 있다”. 관객은 배우 킨에게 환호하지만 인간 킨에게는 무관심하다. 웨일즈 공은 배우를 신기루에 비유했다. 킨은 그 비유에 동의한다. “근엄한 인간들은 환상이 필요하거든요. (…) 그들이 무얼 하냐고요? 어린애를 하나 붙잡아 그를 눈속임으로 바꾸는 거지요. 눈속임, 몽환, 바로 이게 그들이 킨을 가지고 만들어 놓은 겁니다. 나는 가짜 왕자, 가짜 대신, 가짜 장군입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웨일즈 공은 관객이었다. 배우는 결국 관객의 신기루다. 관객이 사랑하는 건 배우일 뿐 인간이 아니다. 킨은 엘레나의 사랑으로 그걸 확신한다. 그런데 재밌는 건 배우가 관객의 신기루로서 관객을 대변한다는 거다. “나는 연기를 하기 위해 스스로를 다른 사람으로 여겼던 거야. 나는 킨을 자처하고, 킨은 햄릿을 자처하고, 햄릿은 포텐브라스를 자처하고”. 킨이 햄릿을 연기할 때, 그는 햄릿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햄릿이라는 배역 뒤로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배우의 자아라는 건 영원히 무로 회귀한다. “나의 재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말을 하고 제스처를 행하는 어떤 기교, 한낱 마술에 불과합니다. 나는 매일 저녁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사람이지요”. 배우는 결국 신기루고, 행위가 아닌 제스처를 취하며, 연기를 통해 자기 상실을 계속하는 존재다.


  킨은 웨일즈 공에게 묻는다. “그리고 당신,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은 혹시 웨일즈 공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배우는 관객의 신기루였다. 배우에게 관객은 타자다. 그래서 배우는 사르트르의 존재론과 맞물린다. 대자, 대타 따위의 개념어들은 집어치우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우리는 반영들에 불과해요. (…) 그게 바로 연극이지”. 우리는 주어진 배역에 어울리는 연기를 하고 산다. 우리는 결국 타자의 신기루다. 타자가 사랑하는 건 우리의 배역일 뿐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배역을 연기할 때, 우리는 배역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그 뒤로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라는 건 영원히 무로 회귀한다. 그러니까, 우리도 배우다.


  훌륭한 배우일수록 자기 상실은 두드러진다. 엘레나가 물었다. “도대체 배우가 뭔데요?” 웨일즈 공이 답했다. “그건 신기루죠”. 이번에는 사르트르가 묻는다. “도대체 우리가 뭔데요?” 그가 답한다. “그건 신기루죠”. 관객이 사랑하는 건 배우일 뿐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다. 닮은꼴은 우리의 눈길을 끄는 법이다. 어쨌든 배우의 사라짐은 그래서 별스럽다. 언제나 배역 뒤로 사라져 버리던 존재의 마지막 사라짐, 그러니까 우리를 대변하던 알레고리의 마지막 사라짐. 그 사라짐의 양식이 자살일 때는 더 별스러울 테다.


  배우가 자살했다. 그는 유명 배우였고, 석연치 않은 사건에 휘말려 있었다. 그 사건의 진위를 밝히는 건 내 몫이 아니다. 그 죽음의 귀책사유를 밝히는 것도 내 몫이 아니다.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배우의 도덕성을 운운하는 짓은 꼴사납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더 꼴사나운 건 남은 사람들의 소리다. 프로이트는 말했다. “죽은 자에 대해서는 오직 좋은 것만을 (말할지어다)(De Mortuis nil nisi bene (dicendum))”. 바람직하고, 마땅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어디서든지 글을 읽고 쓴다. 프로이트의 말은 욕심일 테다.


스웨덴 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트베르이는 『줄리 양』의 서문에 썼다.


“여기 누가 자살했다! 좋지 않은 일이군! 브르즈와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불행한 사랑이군! 여자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병이 있었군!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절망을 경험했군! 낙오자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것이나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 어느 것도 정확한 이유가 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직 저 세상으로 가버린 자만이 진짜 이유를 감추고 그것을 생의 기억들을 가장 잘 밝혀줄 수 있을 어떤 것으로 위장한 채로 사라져버렸다!”


  자살은 자연사가 아니므로 왜라는 의문을 남긴다. 그래서 자살은 더없이 개인적이어도 개인적일 수가 없다. 남은 사람들은 제 나름의 변론을 계속한다. 정치인들. 그들의 충실한 노예로서 앞이마에 좌 또는 우, 인을 찍고도 모르는 척 헌법 제1조 제2항의 원칙을 지껄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지껄임에 꼬리를 물고 내가 이만큼 이성적이라고 떠들어대는 머저리들. 사람의 몸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다.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 할머니는 망자의 몸에서 가장 늦게 닫히는 구멍은 귀라고 말했다. 내 가족들은 꺽꺽 울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들었다. 죽은 사람이 배우일 때, 부딪치는 건 말들이 아니라 소리였다. 그비극이었다.


  어느새 31일이다. 내일은 2024년 1월 1일이라고들 한다. 나는 <체포왕>에서 처음 당신을 봤다. 내가 올해 독일에 있을 때, 대형서점에는 당신의 영화 DVD가 두 개나 있었다. 어쩌면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독일에서 만난 친구는 <기생충>을 봤다고 했다. 친구는 당신의 부고를 듣고 “영화 같다”라고 말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괜히 마음이 언짢다. 내일은 새해가 올 텐데. 어쨌든 여기는 머저리들의 소리보다 추모의 글이 흘러넘친다. 나는 당신의 남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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