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명 Jan 07. 2024

<슬라이딩 도어즈>(1998)

모든 순간이 우연이었다. 

  <슬라이딩 도어즈>(1998)의 기네스 팰트로는 끔찍하게 예쁘다. 영화를 보고 별반 남는 게 없었는데도 이 글을 적는 건 기네스 팰트로 때문이다. 

  <슬라이딩 도어즈>의 주연은 헬렌(기네스 팰트로 분)이다. 헬렌은 잘 나가는 회사 홍보팀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가 어처구니없는 일로 해고되고 만다. 헬렌은 나름 당차게 할 말을 하고 출근길을 되돌아간다. 그러나 지하철 역에서도 운은 따라주지 않는다. 헬렌은 계단을 뛰어오르던 아이를 피하다가 지하철을 놓친다. 다음 열차가 연착되었다는 안내방송까지 들린다. 지지리도 재수가 없는 날이다. 불운이 겹칠수록 인간은 상상으로 도피한다. 만약, 혹시 따위의 가정假定이 흔한 도피처다. 헬렌의 상상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상상 속 헬렌은 간신히 지하철에 오른다. 지하철을 놓치고 놓치지 않고는 유별난 일이 아닐지 몰라도, 유별난 일의 기점은 될 수 있다. 상상 속 헬렌은 지하철을 타고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현실 속 헬렌은 헬렌 1, 상상 속 헬렌은 헬렌 2, <슬라이딩 도어즈>의 주연은 둘이다.

헬렌 1

  헬렌이 지하철을 놓쳤을 때, 애인 제리(존 린치 분)는 그의 파트너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다음 열차가 연착되었으므로 헬렌은 우선 역 바깥으로 나간다. 그러나 그날은 지지리도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소매치기가 헬렌의 가방을 빼앗고 얼굴에 상처를 낸다. 하는 수 없이 헬렌은 병원으로 간다. 제리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바람을 피우는 사람은 밤낮없이 바쁘다. 헬렌은 집으로 돌아간다. 제리의 파트너는 현장을 벗어난 지 오래다. 

  “이런 말 해봤자 소용없지만 만약 내가 그 전철만 탔더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텐데”. 제리는 능력 없는 소설가에 바람까지 피우면서도 지고지순한 체하는 파렴치한이다. 그는 헬렌을 달래주려고 별 짓을 다한다. 어쨌든 진실을 모르는 헬렌은 그게 마냥 고마울 뿐이다. 그녀는 웨이트리스로 일하기 시작한다. 벌이가 부족했는지 샌드위치 배달 일도 겸한다. 헬렌은 제리와 함께 살고 있다. 제리는 소설을 붙잡고 사는 몽상가였으므로 헬렌은 이 일 저 일 가릴 처지가 못된다.

  헬렌은 제리를 사랑한다. 그러나 제리가 헬렌을 안아주지 않은 건 두 달째다. 의심의 싹이 자란다. 제리를 미행해 봐도 건진 건 없다. 제리는 꽤나 철두철미하다. 하지만 그도 헬렌을 사랑한다. 제리는 파트너에게 절대 헬렌을 떠나지는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는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속죄할만한 용기는 없다. 몸정은 그만큼 무섭다. 

  그래도 여자의 촉은 무시 못한다. 브랜디 잔이 왜 두 개였을까. 의심의 싹이 점점 자란다. 그런데 헬렌의 몸에서도 싹이 자라고 있었다. 언제 거사를 치렀는지 헬렌은 임신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제리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지 못한다. 의심의 싹이 자랄 만큼 자랐다. 헬렌은 결국 진실을 묻는다. 제리는 언제나처럼 지고지순한 체한다. 그때 제리의 파트너가 찾아온다. 그녀도 임신을 했단다. 헬렌은 그대로 집을 뛰쳐나간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액운을 면하지 못한 모양이다. 차가 헬렌을 들이받는다. 아기는 유산되었어도 헬렌은 살아남았다. 헬렌은 병실에 앉은 제리를 내쫓는다. 그녀가 제임스(존 한나 분)를 만나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헬렌 2

  헬렌이 간신히 지하철에 올랐을 때, 애인 제리는 그의 파트너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헬렌 옆자리에는 제임스가 앉아 있다. 그는 헬렌에게 말을 건다. 그러나 그날은 지지리도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헬렌은 들은 체 만 체 할 뿐이다. 그런데 사실 제임스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헬렌이 해고돼 회사 바깥으로 나올 때 귀걸이를 흘렸는데, 그걸 주워 줬던 사람이 제임스였다. 그래서 헬렌과 제임스는 잠깐이나마 말을 섞는다. 

  헬렌은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가 목격한 건 파트너와 몸을 섞고 있는 제리다. 헬렌은 그대로 집을 뛰쳐나간다. 커플링까지 내던지고 진탕 술을 마시는데 제임스가 들어온다. 헬렌은 제임스에게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제임스는 헬렌을 웃게 만든다. 헬렌은 당분간 친구의 집에 얹혀살기로 한다. 기분 전환을 할 겸 머리도 짧게 자른다. 헬렌은 벌써 제리를 잊었다고 말한다. 그게 허풍이라는 건 짧은 머리만 봐도 알 수 있다.  

  제임스가 헬렌을 찾아온다. 그는 아무래도 헬렌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헬렌은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제임스와 시간을 보낸다. 어쨌든 제임스는 유쾌한 사람이고, 실연의 쓰라림을 달래는 데는 웃음만 한 게 없다. 그는 헬렌에게 직접 홍보 회사를 꾸려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실패해서 완전히 바보가 될 수도 있어요”. “맞아요. 바보는 걱정이 없죠”. 헬렌은 결국 제임스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점점 늘어간다. 

  헬렌의 증조부가 놓은 다리 밑에서 헬렌과 제임스는 처음 입을 맞춘다. 몸을 섞은 건 당장 그날 밤이다. 인간은 영장류 중에서도 긴 음경을 가지고 있다. 남성은 긴 음경을 여성의 몸에 삽입해 피스톤운동을 한다. 그 모든 게 여성의 몸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다른 남성의 흔적을 바깥으로 내보내기에 알맞다. 제리는 이제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헬렌을 쫓아온다. 제리는 끈질기게 사과하고, 헬렌은 밀어낸다. 제임스는 둘을 보고 있었다. 그는 기어이 자리를 피해버린다. 

  그날 이후로 헬렌은 한동안 제임스를 만나지 못한다. 우연히 제임스를 다시 만났을 때는 서로의 말이 얼기설기 뒤엉킨다. 제임스는 어젯밤 출장에서 돌아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말끝이 흐리다. 분명 뭔가 미진한 게 남아있다. 어쨌든 헬렌과 제임스는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 그런데 헬렌이 제임스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곧장 제임스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녀가 제임스의 회사에서 처음 알게 된 건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이다. 제임스는 그제야 진실을 말한다. 지금 아내와는 3년 전에 결혼했고, 6개월 전부터 별거했으며, 곧 이혼할 예정이다. 아픈 어머니 앞에서만 금실 좋은 부부인 척 연기할 뿐, 더 이상 부부라고 할 수 없다. 헬렌은 제임스를 사랑한다. 그녀는 별 수 없이 제임스의 말을 믿기로 한다. 사랑이 위기를 모면한다. 그런데 삶은 위기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차가 헬렌을 들이받는다. 아기는 유산되었고 헬렌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날은 지지리도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헬렌 2는 헬렌 1의 도피처였다. 헬렌 1은 속박된 존재였다. 파렴치한 애인, 엉뚱한 밥벌이에 오도 가도 못했다. 헬렌 2는 해방된 존재였다. 파렴치한 애인이 아닌 버젓한 새 애인, 엉뚱한 밥벌이가 아닌 적성에 맞는 사업장에 생기가 돌았다. 그래도 헬렌 1은 살아남았고, 헬렌 2는 살아남지 못했다. 그래서 헬렌 2가 그럴듯한 도피처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확실한 건 지하철 슬라이딩 도어가 헬렌 1과 헬렌 2의 분기점이었고, 헬렌 1과 헬렌 2는 어쨌든 제임스를 만났다는 것.

  그래서 <슬라이딩 도어즈>는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는 식의 운명론으로 편입되곤 한다. 그런데 헬렌 2는 왜 살아남지 못했는지.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고, 만났으면 땡이다 대충 이런 식인지. 모를 일이다. 뭐 어쨌든 내 눈에 든 건 운명이 아닌 우연이었다. 지하철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고 닫혔던 순간, 헬렌이 귀걸이를 흘리고 제임스가 그걸 주워 줬던 순간, 모든 순간이 우연이었다. 


  물론 운명론자들은 그 모든 순간이 우연이 아닌 불의였다고 말할 것이다. 역사학자는 우연chance과 불의contingency를 구별하곤 한다. 사실 우연과 불의는 그 용례가 다양해 여타 학문에서는 두 용어를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그래도 역사학자에게는 두 용어의 구별이 과연 필요할 텐데, 그건 아무래도 역사학의 젖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연은 드물고, 예측 불가하며, 이런저런 변수가 많아 무작위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불의는 어떤 결과에 선행되어야만 했던 어떤 사건이다. 그러니까 우연은 어떤 사건 자체를 그대로 가리키는 용어고, 불의는 어떤 결과로부터 소급해 올라감으로써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다. 내 부모가 만난 건 우연이었는데, 그건 내 존재의 불의다. 그래서 불의는 우연의 해독解讀이다. 


  다시 돌아가자. 지하철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고 닫혔던 순간, 헬렌이 귀걸이를 흘리고 제임스가 그걸 주워 줬던 순간, 모든 순간이 우연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운명론자들은 그 모든 순간이 우연이 아닌 불의였다고 말할 것이다. 누가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다. 불의는 우연의 해독解讀이었고, 모든 풀이에는 정도定道란 게 없다. 내가 못마땅한 건 불의를 우연의 해독解讀이 아닌 해독解毒으로 생각하는 행태다. 그러니까 우연이 세계, 개인의 발전을 저해하는 반동분자라는 식으로.  


  1913년 8월 18일, 몬테카를로 카지노의 룰렛 테이블. 룰렛에는 검은색 숫자가 18개, 빨간색 숫자가 18개, 녹색 숫자 ‘0’이 하나 있었다. 빨간색 또는 검은색 숫자가 나올 확률은 거의 절반이었다. 그런데 검은색 숫자가 내리 열다섯 번쯤 나왔을 때 도박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빨간색 숫자에 판돈을 걸었다. 그들은 제멋대로 우연이라는 게임의 본질을 욕망으로 희석해 버린 것이다. 빨간색 숫자는 검은색 숫자가 스물여섯 번이나 나오고서야 나왔다. 도박꾼들은 파산했다. 몬테카를로의 오류였다.


  우연을 배척하는 건 인류의 본능이다. 그리고 그 본능은 인류의 성장 동력이었다. 종교, 과학 따위의 기원은 그 본능에서 출발했다. 인류는 거듭 우연을 배척함으로써 진보했다. 그만큼 우연에는 먼지가 뿌옇게 앉았다. 그러나 우연은 마냥 배척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우연에 먼지가 수북이 쌓일수록, 그만큼 인류의 삶은 무거워졌다. 드물고, 예측 불가하며, 이런저런 변수가 많아 무작위로 일어나는 사건은 없다. 비극에는 책임이 있어야만 한다. 내 불행은 내 믿음이, 내 배움이 모자란 탓이다. 구원을, 지식을 목마르게 갈구해야만 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내 삶도 무겁디무겁다. 그러나 가끔 어떤 비극과 부딪치고 자책을 거듭하는 나를 보고 실소할 때가 있다. 그건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을 읽고 나서부터다. 베르그송은 경직성을 희극성의 원천으로 꼽는다. 인간이 생기 존재의 융통성, 유연성을 잃고 기계 존재의 속성을 띄는 건 웃기는 일이다. 오랜 전문직 종사자의 전형적 사고방식, 종교적 관습에 속박된 사람들의 생기 없음은 웃음을 산다. 우연을 마냥 배척하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베르그송은 말한다. “유연한 것, 부단히 변화하는 것, 살아있는 것에 반대되는 경직된 것, 상투적인 것, 기계적인 것, 주의에 반대되는 방심, 요컨대 자유활동에 반대되는 자동현상. 그런 것들이 바로 웃음이 가려내고 교정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슬라이딩 도어즈>의 제임스는 시도 때도 없이 영국 희극 그룹 몬티 파이튼의 <스페인 종교재판> 속 대사를 줄줄 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별반 남는 게 없었는데도 이 글을 적는 건 기네스 팰트로 때문이라고 말했다. <슬라이딩 도어즈>의 기네스 팰트로는 끔찍하게 예뻤다. 그래도 하나 남는 건 있었다. 가끔은 우연에 쌓인 먼지를 입김으로 불어낼 줄 알아야 한다. 어쩌면 <양철북>의 오스카가 제 양철북을 빼앗으려는 누군가에게 유리가 깨져라 소리치듯, 사정없이.


  솔직해지자. 유월의 초여름 내 어머니는 용하다고 소문난 점집에 갔다. 어머니는 어머니 운세가 아닌 내 운세를 점쳤고, 점집에서 나오자마자 내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어머니의 음성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내 운세는 그만큼 좋았다. 점쟁이는 내 별난 기질을 그럴싸하게 짐작했고, 내가 성공해 유명세가 따를 운세라고 말했다. 신이 난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도 나는 점잖은 티를 냈다.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다. 나 같은 날라리 신자와는 다르게 어머니는 주일마다 꼬박 미사를 올린다. 어느새 기억도 안 나는 어머니의 미사포와 난생 본 일이 없는 점쟁이의 오방기가 포개지고 있었다. 그 중첩이 꽤나 공교로워서 전화를 끊고 나는 잠깐 울컥했다. 영화를 보고 별반 남는 게 없었는데도 이 글을 적는 건 어머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끔은 우연에 쌓인 먼지를 입김으로 불어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 운세를 믿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평양랭면>(202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