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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 Jan 14. 2024

<녹터널 애니멀스>(2017)

“모욕이 없는 곳에 복수는 없다”

  수잔(에이미 아담스 분)은 작가 지망생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 분)와 이혼하고 유력 사업가와 재혼했다. 그녀는 사회 경제적으로 성공했지만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어느 날 수잔에게 책 한 권이 도착한다. 소설의 제목은 『녹터널 애니멀스』, 작가는 전남편 에드워드다. 소설은 주인공 토니가 아내와 딸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지나가다가 괴한들을 만남으로써 결국 가족을 잃는 비극을 골자로 하고 있다. 정황상 『녹터널 애니멀스』는 알레고리 소설이다. 수잔은 에드워드의 아이를 낙태하고 떠났다. 그녀는 금방 소설의 알레고리를 알아차린다. 수잔은 겨우겨우 소설을 읽는다. 그녀는 에드워드에게 메일을 보낸다. 수잔과 에드워드는 재회를 약속한다. 약속 당일 수잔은 기다리고, 에드워드는 오지 않는다. 에드워드의 복수는 그렇게 완성된다.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는 “모욕이 없는 곳에 복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어떤 명제의 대우는 참이다. 따라서 복수가 있는 곳에 모욕이 있다. 그래서 어떤 복수의 정당성을 확인하려면 그 복수에 선행하는 모욕을 확인해야 마땅하다. 


  수잔이 에드워드를 떠났던 건 나약함 때문이었다. 에드워드의 나약함은 호주 사회학자 레윈 코넬 식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결여였다. 전통적 가족관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건 아버지다. 그래서 아버지는 출세 경쟁에 투신함으로써 폭력, 공격성 따위를 내면화한다. 이로써 아내, 자녀, 그리고 사회적 약자는 경시될지라도 가족을 위한다는 미명이 모든 걸 정당화한다. 1950년대쯤부터 아버지 역할을 똑바로 해내지 못하는 남자는 세계로부터 소외되어 간다. 그러니까 폭력, 공격성 따위를 체화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남자는 남자답지 못한 남자일 뿐이다. 


  에드워드는 서점에서 일하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수잔은 에드워드가 처한 현실을 보고 말한다. “듣기엔 로맨틱하지. 하지만 이게 다야?” 에드워드가 심혈을 기울여 쓴 소설에서도 그녀는 그의 소극적인 기질을 볼 뿐이다. 수잔은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로, 에드워드를 이상주의자로 단정 지었다. 어쩌면 이별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잔은 이별을 통보했고, 에드워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수잔의 뜻은 완고했고, 에드워드는 그 뜻을 꺾을 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별하는 과정에서 수잔과 에드워드가 주고받은 말은 곱씹어 생각해 볼 만하다. 수잔은 스스로를 냉소적, 실용적인 사람이라고 변론하는데, 에드워드는 대뜸 겁먹지 말라고 응수했다. 그녀가 겁먹은 게 아니라고 재차 말해도 그는 믿지 않는 듯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을 사랑하는지 물었고, 수잔은 그렇다고 답했다. 에드워드는 곧장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에드워드의 마지막 말은 도망치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보통 떠나려는 애인을 붙잡으려는 남자는 스스로의 변화를 약속한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도리어 수잔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 특이점은 그가 남자다운 남자를 원했던 그녀의 속내를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에드워드는 수잔의 소망이 사실은 어머니의 소망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수잔은 그녀의 어머니를 “보수적”, “공화당원”, “물질만능” 따위로 묘사하곤 했다. 과거 그녀는 어머니의 가치관을 온몸으로 거부했었다. 에드워드를 처음 보고 사랑에 빠졌던 뉴욕에서 수잔은 자신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려는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녀는 그녀가 어머니와 비슷한 슬픔을 가지고 있다는 에드워드의 진단에 발끈하기도 했다. 그때 수잔은 에드워드가 위대한 소설가가 되리라 믿었고, 그가 냉소적, 실용적이지 않아서 사랑했다. 

  그러나 가족의 끈은 무척 질기다. 에드워드와의 결혼을 앞두고 수잔은 어머니를 만났다. 그녀는 에드워드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고, 어머니는 어리석다고 일축했다. 어머니는 에드워드의 나약함을 꼬집어 말했다. 수잔은 나약함이 아닌 예민함이라고 반론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멈추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가난하고, 의욕적이지 않으며, 야망이 없다. 당장은 네가 부르주아적 사치라고 폄하하는 것들은 이내 중요해질 테고, 에드워드는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 그래도 수잔은 굴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발 양보해 동거를 허락했지만 결혼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자식은 부모의 그림자다. 어머니의 짐작대로 수잔은 에드워드와 이혼했다. 수잔의 재혼 상대는 유력 사업가였다. 어머니의 소망대로 수잔은 남자다운 남자와 결혼하게 된 거다. 

  그래도 수잔은 불행했다. 남편의 외도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그녀는 불행의 뿌리를 알지 못했다. 우리는 곳곳에 산재하는 수잔의 말로 그 뿌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수잔은 미술관장이었다. 그녀는 지인과 금번 전시회 오프닝 퍼포먼스 아트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지인은 그 작품이 정크 아트를 그대로 반영한 눈부신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수잔은 동의하지 않았다. 지인은 수잔의 자조 섞인 한탄을 듣고 스스로의 성과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무작정 전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수잔은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지인의 조언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수잔은 더 이상 그걸 신뢰하지 않는 듯하다. 

  사실 수잔은 남편과의 대화에서도 남성성에 대한 회의를 품고 있다. 출장을 떠나는 남편에게 수잔은 당신에게 필요한 일이므로 그 일이 잘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남편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고쳐 말하는데, 수잔은 당신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일축했다. 혹자는 수잔이 이미 미술관장으로서 사회 경제적 성공을 일궈냈으므로 더 이상 남자다운 남자가 필요치 않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수잔은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백마 탄 왕자가 없어도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수잔의 변화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대한 거부로 읽혀야 한다. 그건 어머니의 가치관에 대한 거부이기도 할 테다. 몇 가지 미장센이 그 당위성을 확인해 준다. 먼저 전시회 오프닝 퍼포먼스 아트가 있다. 그 작품에서 거구의 여성들은 벌거벗은 채로 춤을 추고 있다. 감독 톰 포드는 그 기이한 영상을 “유럽이 생각하는 미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들 중 몇몇이 미국 국기를 흔들고 있게 함으로써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미국은 긴 시간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매몰되어 있었다. 서부개척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라를 세운 미국의 역사는 강인함, 불굴의 의지 따위로 개괄되곤 했다. 말보로 맨, 더티 해리, 그리고 람보라는 시각적 이미지의 범람이 미국의 남성성을 공고히 했다. 

  작품 속 거구의 여성들은 남자도 아니고, 근육질도 아니며, 적을 처단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여성의 몸으로서 살덩이를 흔들어대며 춤을 춘다. 톰 포드는 남성성을 조롱하고 있다. 그 속내를 헤아리지 못한 군중들은 한바탕 축제를 벌였다. 그러나 수잔은 군중의 소란에 섞이지 못했다. 전시회가 끝나고 군중들은 빠져나갔다. 스크린 안 춤을 추고 있던 여성들은 스크린 밖 설치물 위에 늘어져 있었다. 여성들은 미동도 없었고, 수잔은 검정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과연 장례식 같았다.  

  다음으로 보색 대비가 있다. 보색은 반대되는 색이다. 빨강과 초록, 노랑과 보라 등이 있고, 두 가지 색은 섞여 무채색이 된다. <녹터널 애니멀스>(2017)의 보색은 빨강과 초록이다. 전시회 오프닝 퍼포먼스 아트의 배경, 갤러리 사무실의 벽지, 수잔의 립스틱은 전부 빨강이다. 빨강은 정열, 흥분, 적극성 등을 상징하므로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상징색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초록은 평화, 안전, 중립 등을 상징하므로 빨강과 대극 관계에 있다. <녹터널 애니멀스>의 초록은 결말부에서야 두드러진다. 수잔과 에드워드는 재회를 약속했다. 약속 당일 수잔은 빨간 립스틱을 지우고 초록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에드워드를 기다리는 내내 컵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지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의 총이 있다. 소설은 소설은 주인공 토니가 아내와 딸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지나가다가 괴한들을 만남으로써 결국 가족을 잃는 비극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정황상 『녹터널 애니멀스』는 알레고리 소설이었다. 총이 그 알레고리를 강화한다. 총은 남근의 대체물로서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상징한다. 톰 포드는 총의 보편적 상징성을 적극 활용한다. 소설의 주인공 토니는 나약한 남자다. 그는 가족을 위협하는 괴한들에게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못한다. 괴한이 겁먹은 토니에게 “고추 없는 놈!”이라고 조롱하고 가족을 납치해 가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마땅치 않다. 

   괴한들은 결국 아내와 딸을 살해한다. 토니는 보안관과 함께 괴한들을 쫓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괴한들은 잡혔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고 만다. 보안관은 토니에게 법적 절차 따위는 개나 주고 괴한들을 처벌할 의사가 있는지 묻는다. 토니는 망설인다. 그러나 보안관이 토니를 몰아붙임으로써 일종의 자경단이 조직된다. 괴한들을 찾은 보안관이 토니에게 총을 준다. 하지만 토니는 총을 쏘지 못하고 괴한들은 그 틈에 다시 도망친다. 보안관이 괴한들을 쫓아가 그중 한 명을 총으로 쏜다. 현장을 목격한 토니는 울부짖고 있을 뿐이다. “말렸어야 했는데!” “내가 정신 차렸어야 했어”. 토니는 총을 가지고도 쏘지 못했고, 총에 맞은 괴한을 보고도 통쾌해하지 못했다. 

  토니는 나약한 남자였다. 그가 괴한들을 쫓은 건 전적으로 보안관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입식 가치관의 끝은 자멸이다. 그 명제는 재차 증명된다. 토니는 보안관의 끈질긴 설득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괴한들을 쫓는다. 그는 결국 그중 한 명을 찾아내고 총구를 겨눈다. 토니는 괴한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와 딸을 살해한 동기를 되묻는다. 괴한은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면서 재차 토니를 조롱한다. 괴한은 말한다. “넌 너무 약했어. 너도 네가 약한 걸 알고 있겠지. 넌 뭘 하지도 못할 정도로 약해빠졌어”. 그 말이 도화선에 불을 댕긴다. 토니는 괴한을 총으로 쏜다. 혹자는 토니의 발포를 자발적인 복수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토니는 분명히 제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토니가 괴한을 총으로 쏜 건 나약하다는 말 때문이었다. 어떤 평가에는 요구가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나약하다는 말은 강해지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주입식 가치관의 끝은 자멸이라고 말했다. 토니는 현장을 빠져나가다가 자신의 권총 오발로 목숨을 잃는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알레고리 소설이었다. 톰 포드가 영화의 주인공인 에드워드와 영화 속 소설의 주인공인 토니의 배역을 몽땅 제이크 질렌할에게 맡겼으므로, 토니가 에드워드의 분신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수잔은 에드워드의 나약함을 힐난했고, 그 나약함이 에드워드로 하여금 수잔과 뱃속 아이를 상실케 했다. 배신감에 사로잡힌 에드워드는 나름의 복수를 계획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수잔에 대한 배신감을 곱씹었을 테다. 그 배신감의 뿌리에는 수잔의 무책임함이 있었다. 수잔이 이별을 통보했을 때, 그녀는 분명 에드워드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 모순은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식의 지리멸렬과는 거리가 있다. 수잔과 에드워드의 이별에는 어머니로부터 주입된 가치관이 있었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수잔이 도망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수잔은 무책임하게 도망쳤다. 그녀는 사랑의 결실인 뱃속 아이를 에드워드 몰래 낙태하기도 했다. 

  에드워드는 수잔의 무책임함을 꾸짖고 싶었을 것이다. 소설은 그 수단이었다. 에드워드는 말했다. “모든 게 살아있도록 하는 거야. 결국, 죽게 될 것들을 보호하는 거지. 글로 남겨 놓으면 영원할 테니까”. 사랑과 증오, 배신과 복수, 그 모든 건 시간에 풍화된다. 그런데 문자가 그 시간을 무화한다. 그래서 에드워드의 복수는 영원할 수 있다. 영원할 소설은 아름다웠고 잔인했다. 소설은 노골적으로 수잔을 꾸짖고 있었다. 주입식 가치관의 끝은 자멸이다. 수잔은 그 꾸짖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침 주입식 가치관의 끝은 자멸임을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수잔은 금방 소설의 알레고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소설을 읽으면서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수잔은 어느 직원의 해고를 요구하는 다른 직원들에게 “때로는 뭔가 바꾸는 게 그다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소설 속 토니가 괴한을 총으로 쏠 때, 그녀는 세례를 받듯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세례는 재탄생이다. 수잔은 에드워드와 재회하기로 마음먹었다. 약속 당일 그녀는 초록 드레스를 입고, 빨간 립스틱을 지우며, 엷게 웃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오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수잔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유치하고 졸렬한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소설 속 토니는 괴한을 총으로 쏘고 그 총에 맞아 죽었다. 토니의 자멸은 주입식 가치관의 끝은 자멸임을 상징하는 알레고리였다. 토니는 에드워드의 분신이므로 토니의 자멸은 에드워드의 자멸이기도 하다. 에드워드는 소설에 메모를 동봉했다. 메모에는 이번 소설은 이전과는 다른 성질을 띠고 있고, 새로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수잔 때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아닌 것에 관해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소설의 성질이 달라졌다는 선언은 그 자신이 달라졌다는 선언임에 다름 아니다. 수잔이 그리워했던 건 과거의 에드워드였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수잔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과거의 에드워드는 어디에도 없다. 

  톰 포드는 말했다. “수잔은 전남편과 함께 지냈던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고 그와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게 된다”. 톰 포드는 “수잔의 일상을 흔들어 놓은 것 자체가 복수”라고도 말했다. 그런데 그는 “핵심 주제는 복수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덧붙였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톰 포드는 다시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언제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피상적인 세계에 살고 있어요. 그래서 길에 튀어나온 요철이 있으면, 즉 약간의 장애라도 있으면 사람들은 노력하길 그만두고 헤어집니다. 당신이 본능적으로 마음이 통한다고 느끼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아주 적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사람들을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톰 포드는 현대인의 사랑법을 꼬집어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특징으로는 무한한 정보 접근성, 극대화된 선택 가능성 따위가 있다. 각 특징은 여러 긍정적 가능성을 내포하는 만큼 부정적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그중 극대화된 선택 가능성은 어떤 착각을 일게 한다. 계산, 판단으로 모든 걸 소유할 수 있다는 착각. 그래서 현대인은 언제든 남보다는 내가 우선이고, 내 계산법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건 쉽게 배제하곤 한다. 깊은 교류는 그래서 회피된다. 깊은 교류는 어쩔 수 없는 상처를 동반하는데, 그게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식이다. 


  사랑은 깊은 교류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의 본질을 “둘이 등장하는 하나의 무대”라고 정의했다. 바디우 식 사랑에서는 통일이나 전체보다는 분리나 구분이 강조되고 있다. 사랑은 분리되어 있던 두 사람에 만남이라는 사건이 더해짐으로써 시작된다. 그런데 그 만남은 우연적으로 일어난 돌발적 사건일 뿐이다. 그래서 만남은 사랑의 시작일 뿐 완성이 아니다. 사랑의 완성은, 바디우 식으로,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이다. 사랑은 나의 세계에서 너의 세계로 진입하는 기적이다.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했을 때 읽었던 어떤 소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했을 때 들었던 어떤 음악, 그리고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했을 때 먹었던 어떤 음식, 그 모든 건 너의 세계에서 유영하던 내 지느러미에 묻은 모래알이다. 


  결국 바디우가 말한 사랑의 완성은 세계관의 변화, 삶의 변화일 테다. 그런데 변화에는 대가가 따른다.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충돌해 생기는 생채기가 바디우 식 사랑의 대가다. 그 충돌은 어쩔 수 없고 끝이 날 줄 모른다. 그 충돌에 질려 변화를 그만둘 때 사랑은 도망간다. 물론 남보다는 내가 우선이고, 내 계산법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건 쉽게 배제하는 경향은 유용한 방어 기제다. 그러나 그 방어 기제가 일순간 무책임한 회피로 전락하기 쉽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하고 싶은 말이 남았어도 그만 떠들어야겠다. 문득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왜 그토록 멍청스러워 보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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