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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 Jan 28. 2024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불안

  이동진은 홍상수 영화 속 욕망의 4 원소를 남자, 여자, 침대, 그리고 술로 정리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서도 욕망의 4 원소는 끈끈하게 엉켜 있다. 삼류 소설가 효섭(김의성 분), 효섭의 팬 민재(조은숙 분), 효섭의 애인 보경(이응경 분), 보경의 남편 동우(박진성 분)가 도시 공간을 유랑한다. 서점, 식당, 여관, 출판사, 커피숍까지, 유랑을 언제쯤 마칠 수 있을지 대중할 수가 없다. 침대가 있으면 섹스를 하고 술이 있으면 마신다. 사건이라고 할 만한 건 죽음 정도다. 그러나 그 죽음마저 사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오히려 서점에서 책을 읽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여관에서 섹스를 하는 따위의 허튼짓이 사건이라면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홍상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은 사람은 첫 문단을 알아들을래야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홍상수 영화는 글만으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그건 글쓴이의 자질과는 별개로, 홍상수 영화가 글로 쓰일 수는 없다는 공리公理에서 비롯된다. 물론 나는 홍상수 영화에 별달리 흥미가 없어서 별달리 할 말도 없고, 그래서 내가 홍상수 영화에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건 말이 아니라 지껄임과 같다. 그러나 내 주변 영화깨나 봤다는 사람들, 걔 중에서도 홍상수 영화를 찬양하는 사람들이라고 별달리 남다를 건 없었다.


  나는 이제껏 홍상수 영화를 다섯 편 남짓 봤는데, 남는 건 하나였다. 홍상수 영화가 좋다고는 말 못하겠는데 나쁘다고도 말 못하겠고, 뭐가 좋은가 글로 쓸 수 있다고는 말 못하겠는데 쓸 수 없다고도 말 못하겠다.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는 어떤 서사도 없이 여덟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전경을 보여준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어떤 대상을 여덟 시간 동안 보고 있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 예술평론가 아서 단토는 <엠파이어>는 지루할지라도 그게 영화라는 사실만큼은 지루하지 않다고 말했다. 단토는 <엠파이어>의 감상 대상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자체가 아닌 워홀이 영화라는 매체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재현했다는 사실임을 천명하고 싶었을 테다. 내가 홍상수 영화를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어느 정도 단토와 비슷하다.

   모르긴 몰라도 영화평론가를 자청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들이 홍상수 영화를 좋다고 말하는 건 영화라는 매체를 메타적으로 성찰한 결괏값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게 아니라면 결여, 욕망 따위의 흔해 빠진 말을 할 수도 있겠고. 그래서 나는 그 두 가지를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미 말이 차고 넘치는 곳에 한 바가지를 더 붓는 건 아무 의미도 없을뿐더러 내 기질에도 맞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읽으려고 쓸 뿐이다.


  나는 말했다. “침대가 있으면 섹스를 하고 술이 있으면 마신다. 사건이라고 할 만한 건 죽음 정도다. 그러나 그 죽음마저 사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오히려 서점에서 책을 읽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여관에서 섹스를 하는 따위의 허튼짓이 사건이라면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니체는 말했다. “두 종류의 평등―평등에 대한 욕구는 다른 사람을 모두 자기 수준까지 끌어내리려고 하든가(트집잡거나, 묵살하거나, 다리를 걸어서), 아니면 여러 사람과 함께 자신도 끌어올리려는 것으로(칭찬하거나, 돕거나, 타인의 성공을 기뻐하며)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홍상수는 말했다.


“현실은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방식이 망치로 빵 때리는 식은 싫다. ……그것은 메시지나 해결책을 강요하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낯설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로써 자신의 모습이 좀 더 분명히 보일 것이고, 비로소 변화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개선 없이 사회의 변혁은 불가능하다”.


  나는 말했고, 니체는 말했고, 그리고 홍상수는 말했다는 식의 과감한 문단 구성에는 홍상수의 말을 알아들으려는 절박함이 있다. “내 영화에는 주제나 메시지 같은 건 없습니다”라는 홍상수의 말처럼 홍상수 영화는 불투명하다. 홍상수 영화에는 뚜렷한 사건, 서사 같은 건 없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를 향한 평단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소수의 관객들은 찬사를 보내곤 한다. 앞서 말했듯, 영화라는 매체를 메타적으로 성찰함으로써, 결여, 욕망 따위의 흔해 빠진 말을 함으로써. 그게 맞든 틀리든 상관없다. 나는 홍상수의 말을 알아듣고 싶을 뿐이다.


  홍상수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다르게’, ‘낯설게’ 보여”준 건 무엇이었고, 그로써 “좀 더 분명히 보”인 모습은 무엇이며, “비로소 변화 개선”된 것 무엇인가. 나는 어떤 기분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볼 때 거듭 나를 휘감았던 그 기분으로. 민재와 커피숍에 있던 효섭이 별안간 바깥으로 나와서 화분을 기어 다니는 벌레로 장난을 칠 때, 효섭이 고깃집 벽에 걸린 백두산 천지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볼 때, 보경의 장례식에서 그녀가 부활해 거실 바깥으로 걸어 나올 때, 나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세 가지 사례를 들었다고 해서 내 불안이 세 번에 그친 건 아니었다. 나는 적어도 한 시간 남짓 동안 불안해하고 있었을 게다.

  민재와 커피숍에 있던 효섭이 별안간 바깥으로 나와서 화분을 기어 다니는 벌레로 장난을 칠 때, 효섭이 별안간 고깃집 벽에 걸린 백두산 천지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볼 때, 보경의 장례식에서 그녀가 별안간 부활해 거실 바깥으로 걸어 나올 때, 나는 그 쓸모를 계산하고 있었다. 벌레는, 백두산 천지 사진은 오브제였을까, 보경의 부활은 알레고리였을까. 그러나 1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 계산은 도통 들어맞지 않았다. 모든 게 손아귀에서 미끄러지고 있었다. 파편을 다시 쓸어 담아도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었다. 그래도 영화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불안했다.


홍상수는 말했다.


“사람에게 본질이 있어서 어떤 모습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행동들이 있고 겉으로 나타나는 ‘표면’이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 표면을 아주 정밀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 굳이 본질부터 설명하지 않더라도 점점 모여서, 보는 이에게 와닿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홍상수의 말처럼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있는 건 표면이고 파편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파편을 단서로 서사를 추적하고 있었다. 추적된 서사로는 어떤 담론을 꿰어 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있는 건 표면이고 파편일 뿐이었다. 그곳에는 인과성 대신 우연성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게 평등했다. 니체 식으로는 전자의 평등이었다. 홍상수는 인과성에 트집을 잡고, 묵살하며, 다리를 걸고 있었다. 나는 꼼짝없이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독일 종교시인 안겔루스 질레지우스는 썼다. “장미는 이유 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피기 때문에 필뿐이다. 장미는 그 자신에도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지도 묻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장미를 계산하기 바쁘다. 장미의 품종, 개화 시기, 더러는 그 붉음까지도. 근거를 따져 묻는 건 체험이 아닌 계산일 뿐이다. 계산으로 사물은 고유 존재를 잃고 어떤 조건들로 해체되어 버린다. 하이데거가 끔찍하게 비판했던 우매함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남긴 건 그 우매함이다.


  그러나 우매함을 상기했다고 해서 단숨에 명석함을 되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언젠가 내가 홍상수 영화를 다시 볼 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불안해하고 있을 게다. 중요한 건 불안을 직면하는 담대함이다. 하이데거에게 불안은 근본기분이다. 불안은 인간으로 하여금 일상으로부터 내면으로 침잠케 한다. 그러니까 불안은, 일상성, 친숙함 따위를 무너뜨림으로써 그곳에 매몰되어 있던 인간을 구출하는 기분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불안은 근본기분으로서 존재의 열림이라는 사건이다.


  불안은 이제껏 친숙했던 세계, 그곳에 안주하고 있던 인간을 무화한다. 그로써 무한한 가능성이 상정되는데, 무한한 고독이 그 가능성에 동반한다. 어떤 인간이든 발판으로 삼던 세계가 사라지는 건 두려운 일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불안 속에서 우리에게 엄습해 오는, 존재자 전체의 이러한 뒤로 물러감이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거기에는 붙잡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오직 거기에 남아 있어 우리에게 덮쳐오는 것이란, 존재자가 쑥 빠져나감으로써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뿐이다”.


  인간은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애를 쓴다. 불안은 섬뜩하다. 섬뜩한 기분을 꺼리는 건 죄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불안은 무한한 고독과 더불어 무한한 가능성을 상정한다. 불안을 체험하는 인간은 친숙했던 세계가 사라졌다는 고독감으로 니힐리즘의 포로가 되기도 하고, 도리어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으로 조물주가 되기도 한다.


  어쨌든 누구에게나 때가 있는 법이다. 그날을 위해 불안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불안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단지 잠들어 있을 뿐이다. 불안의 숨소리는 터-있음[현존재]을 통해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겁 많은 사람’에게 그 소리는 가장 나지막이 떨릴 것이며, 분주히 일에 몰두한 채 ‘그건 그렇고’ ‘저건 아니라’고 소란하게 떠는 사람에게는 거의 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제하는 사람에게는 [불안의 숨소리는] 가장 쉽게 떨릴 것이며, 아주 모험적인 사람에게는 가장 확실하게 떨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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