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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 Nov 23. 2023

<초록물고기>(1997)―상

배태곤은 메타포다.

 그것이 소설이든 영화든, 이창동의 작품 속 주인공은 고통받는다. 그 고통은 현실의 부조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인공은 대개 파국을 면치 못한다. 이창동은 그렇게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파국이 어떤 모양이든 간에, 우리는 결국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는 우리네 현실을 곱씹게 된다. 이창동의 첫 영화 <초록물고기>(1997)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끝나고 우리는 버드나무가 여전한지 무척 궁금할 테다.

 작가적 맥락에서든 장르적 맥락에서든, <초록물고기>는 말해 볼 만한 작품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말해진 것이 많다. 개중에는 훌륭한 것도 차고 넘친다. 그래서 나는 초록물고기만을 말할 것이다. <초록물고기>의 주인공 막동(한석규 분)은 살인을 하고서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를 찾았지만 수화기 너머에는 큰 형(이호성 분)이 있었다. 큰 형은 뇌성 마비 환자다. 막동의 독백이 시작된다.


 “큰 성 생각나? 빨간 다리. 빨간색 철교. 우리 어렸을 때 빨간 다리 밑으로 물고기 잡으러 많이 다녔었잖아. 내가 저 언젠가 초록색 나는 물고기 잡는다 그러다가 쓰레빠 잃어버려 가지고, 큰 성이랑 형들이랑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쓰레빠 찾으러 다녔었잖아”.

 울다가 웃다가 막동이 끝내 토로하는 것은 어린 날의 추억이다. 그래서 <초록물고기>의 초록물고기는 막동의 잃어버린 순수를 상징해 왔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막동은 내내 순수하기만 했다. 그는 어릴 때 초록물고기를 잡지 못했다. 잃어버린 순수는 없었다. 나에게 초록물고기는 막동의 꿈이다. 그 꿈은 헤테로토피아다.


 막동은 군대에서 갓 제대한 스물여섯 청년이다. 그는 거창하게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다. 꿈이 하나 있다면 가족들과 모여 살면서 공장이든 식당이든 함께 하는 것이다. 제대한 날 귀향 열차에서 막동은 미애(심혜진 분)의 빨간 스카프를 줍게 되고, 그것을 돌려주려다가 무뢰배들에게 희롱당하고 있는 미애를 구해준다. 결국 돌려주지 못했던 그 스카프를 돌려주기 위해 그는 미애를 다시 만난다. 그런데 미애는 그것을 막동에게 선물로 주고 자신의 애인인 조폭 두목 배태곤(문성근 분)을 통해 일자리도 마련해 준다. 막동은 나이트클럽의 주차관리인으로 시작해 강단 있는 성격으로 배태곤의 신임을 얻는다. 그런데 불현듯 막동과 미애가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미애는 배태곤의 품을 벗어나기를 갈구하지만 막동은 그렇지 않다. 막동에게는 꿈이 있다. 공장이든 식당이든 돈이 적잖이 필요할 일이다. 그래서 막동은 배태곤에게 충성한다. 어느 날 배태곤이 막동에게 상대 조직의 두목 김양길(동방우 분)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막동은 그대로 하고, 그래서 배태곤에게 죽는다. 그가 죽고 나서야 막동의 가족은 모여 살면서 식당을 하게 된다. 우연히 배태곤이 미애를 데리고 식당에 들른다. 미애는 그 식당이 막동의 어린 시절 사진 속 집과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초록물고기>는 그렇게 끝난다.

 다시 돌아가자. 나에게 초록물고기는 막동의 꿈이었고, 그 꿈은 헤테로토피아였다. 그 감상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초록물고기>의 시공간적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초록물고기>는 1990년대 일산과 영등포에서 전개된다. 감독이었던 이창동을 비롯해 영화에 출연했던 문성근, 명계남 등은 그때 일산에 살고 있었다. 일산은 1990년대 1기 신도시였다. 영등포도 재개발 지역인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초록물고기>에서 재개발은 중요한 소재가 된다. 막동은 배태곤의 재개발권을 지키는 데 이바지함으로써 그의 신임을 얻었다. 그런데 그는 제 손을 짓이겨가며 지켰던 그 재개발건물에서, 배태곤에게 죽었다.

 근대화는 주거 양식의 변화를 야기했다. 아파트의 보급이 그 대표격이다. 산업혁명 이후 급속한 도시화로 유럽에서는 주택난이 심각했다. 그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아파트가 보급되었다.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주택-도구”라는 새로운 정신을 주창했다. 근대의 주택은 비행기, 기차 등과 같은 하나의 상품으로서 주택난이 심한 도시에 대량으로 보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에게 아파트는 다분히 근대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도시의 노동자를 수용함으로써 도시화, 산업화를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파트라는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했다. 재개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막동은 귀향열차를 타고 대곡역에서 내렸다. 나가는 곳은 두 갈래였다. 양쪽 모두 일산 신도시로 이어졌다. 막동은 한참이나 두리번거렸다. 고향이 예전 같지 않았다. 논밭은 거의가 사라졌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었다. 막동은 셋째 형에게 말했다. “동네가 너무 많이 변했어. 신도시 들어서면서 팍 찌그러져가지고”. 중국계 미국인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들 때 그곳은 장소가 된다”라고 말했다. 막동에게 일산은 장소였고, 일산 신도시는 공간이었다. 막동은 그 공간의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동네가 너무 많이 변했”다는 막동의 말에 셋째 형은 “전엔 뭐 별 거 있었냐”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둘째 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형님, 그 우리 식구들 전부 같이 모여 살면 안 될까 옛날같이? 아버지 계실 때 좋았잖아”. 막동이 둘째 형에게 물었다. “아직도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하냐?” 둘째 형이 답했다. 이방인은 고향이 그리워 망향가를 부른다. 막동은 이방인이었다.

 지금의 고향은 그때의 고향이 아니고, 지금의 가족은 그때의 가족이 아니다. 막동은 알 수 없는 현에서 과거로 침잠해 버린다. 그는 어린 시절 사진이 닳고 닳도록 본다. 그곳에는 그때의 고향이 있고 그때의 가족이 있다. 그때는 아버지가 있었다. 막동은 아버지의 부재를 메움으로써 그때로 회귀하려고 한다. 어머니는 가는귀먹었고 첫째 형은 뇌성마비 환자다. 둘째 형은 계란차로 근근이 살아가고 셋째 형은 알코올 중독이다. 막냇동생은 다방 레지로 일하고 있다. 막동은 날품팔이를 하기로 한 어머니에게 말한다. “엄마, 이제 그런 거 하지 마. 내가 돈 많이 벌테니까”.

 막동은 가장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가진 기술이 변변치 않다. 여동생이 일하는 다방을 찾아가 돈을 벌겠다고, 이런 일 하지 말라고 큰소리는 쳐도, 동생이 주는 용돈을 받고 돌아온다. 청년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창동은 말했다. “액션물에서 흔히 보는 것 같은 상투적인 움직임과 멋있는 과장을 피하고 그들의 격투 자체가 사실적이면서도 뭔가 젊음의 허망한 분출처럼, 그러면서도 막동이의 폭발적인 성격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막동은 호전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젊음의 허망한 분출”일뿐이다. 막동은 무기력한 얼굴을 하고 있다.

 배태곤이 준 일자리는 무척 소중했을 것이다. 막동은 배태곤 밑에서 최선을 다한다. 막동의 충성은 얼핏 과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막동은 갓 제대한 청년이다. 군인은 군사화된다. 군사화는 위계질서와 복종, 무력을 통한 문제 해결 등 군사적 메커니즘을 각인하는 것이다. 막동은 집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네, 통신보안 김병장”이라고 말했다. 각인은 그렇게나 힘이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 막동은 순수한 사람이다. 꿈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순수는 혼종의 대극이다. 배태곤은 막동을 식구라고 선언했다. 그는 그만큼 막동을 아껴 주기도 했다. 막동에게 식구는 식구였을 것이다. 충성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순수함의 단면은 단순함이다. 단순한 사람은 어떤 것의 이면을 놓치곤 한다. 배태곤은 조폭 두목이었다. 그런데 그는 조폭이 아닌 사업가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김양길의 조직이 배태곤의 조직을 습격했을 때 싸움이 일어났다. 사태가 수습되고 배태곤은 조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깡패냐”고 질책하고 얼차려를 줬다. 배태곤은 김양길을 “생양아치 새끼”로 묘사했다. 김양길 조직에게 복수해야 하지 않느냐는 어떤 조직원에게 그는 “내 식대로 한다”고 일갈했다. 배태곤은 곧장 미애를 어떤 검사가 있는 모텔방으로 보냈다. 그것은 사업가의 방식이다.

 배태곤은 메타포다. 그는 조폭으로서 사업가를 자청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식 자본주의의 단면을 상징한다. 부의 축적, 이윤의 추구라는 자본주의적 목표가 복종, 폭력이라는 전자본주의적 수단으로 성취되는 모순. 경찰, 검사가 대변하는 공권력이 그 짝패다. 막동은 배태곤에게 죽었다. 그가 배태곤이라는 메타포를 알아차렸더라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배태곤은 한국식 자본주의의 단면이었다. 근대화, 천민자본주의가 그 단면의 변형이다. 젊은 배태곤은 어느 김밥집에서 김밥 세 줄과 오뎅 국물을 훔쳤다가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때 그는 다짐했다. “니기미 좆같은 새끼들아, 두고 보자”. 배태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았다. 그는 그렇게 그 김밥집이 있던 건물의 재개발권을 따냈다. 재개발은 배태곤의 꿈이다. 그런데 그 꿈이 막동의 꿈과 상충하고 있다. 또다시 돌아가자. 나에게 초록물고기는 막동의 꿈이었고, 그 꿈은 헤테로토피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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