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명 Nov 24. 2023

<초록물고기>(1997)―하

배태곤이 죽였고, ‘배태곤’은 살아 있다.

 앞서 말했듯, 아파트라는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다. 재개발은 그렇게 시작된다. 근대적 공간의 보급은 전통적 장소의 해체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전통적 장소에는 경험, 삶, 그리고 애착이 녹아 있었다. 근대적 공간은 그것 모두를 해체하고, 자신의 것으로 대체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근대적 공간의 인간관계는 합리적인 화폐적 관계라고 말했다. 화폐적 관계는 수량화된 것이다. 주는 만큼 받아오고,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 인간관계가 도구화된다. 배태곤은 메타포였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는 근대적 공간의 근대성을 우려했고, 그것에 저항했다. 그는 현실 공간과는 다른 공간 개념을 제시한다.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가 그것이다. 유토피아는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관념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헤테로토피아는 실재하는 것으로서 현실에 존재하는 유토피아다. 우리는 헤테로토피아에서 현실 공간에서와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헤테로토피아는 “다른 정상적이라고 불리는 공간들에 이의제기하고 반박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근대적 공간의 근대성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푸코는 우리의 상상, 환상의 놀이가 어떤 공간을 헤테로토피아로 탈바꿈한다고 말한다. 어떤 공간에서 우리가 향유하는 쾌락이 그 공간을 현실 공간에 저항하게 한다는 것이다. 휴양지, 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매춘굴 모두 헤테로토피아가 될 수 있다. 휴양지에는 노동이 없다. 박물관과 도서관에는 근대의 선형적 시간이 없다. 그리고 매춘굴에는 성의 금기가 없다. 우리는 그곳에서 현실 공간에서 금기시되는 욕망을 발현할 수 있다. 헤테로토피아의 사례만 보더라도 그것은 명확한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다. 우리가 금기시된 욕망을 발현할 때 어떤 공간은 헤테로토피아로 탈바꿈한다.


 큰 꿈이 있고, 작은 꿈이 있다. 막동의 큰 꿈은 가족과 모여 살면서 공장이든 식당이든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 큰 꿈은 ‘배태곤’에 저항하는 것이다. 근대화는 가족공동체와 전통적 장소를 해체한다. 막동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인근에서는 재개발이 한창이다. 버드나무가 있는 그의 집도 언제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푸코에게 몸은 하나의 공간이다. 그래서 몸은 헤테로토피아가 될 수 있다. 막동의 작은 꿈은 미애다. 그 작은 꿈은 배태곤에 저항하는 것이다. 배태곤은 미애의 정부情婦다. 어쨌든 막동의 꿈은 헤테로토피아였다.

 우리가 금기시된 욕망을 발현할 때 어떤 공간은 헤테로토피아로 탈바꿈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막동은 금기를 어기지 못했다. 그가 금기를 어길 수 있었던 때는 있었다. 막동과 미애는 밤기차 여행을 떠났다. 기차에서 막동과 미애는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시시콜콜한 장난을 걸고 막동의 어린 시절 사진을 나눠보았다. 막동과 미애는 입을 맞추기도 했다. 밤기차에서 내렸고 미애는 배태곤의 전화를 받았다. “어떡할 거야? 난 막동 씨가 하자는 대로 하겠어”. 미애가 물었다. “가야죠. 형님이 오라고 했으니까요”. 막동이 답했다.

 미애는 여사제다. 그녀는 은연중에 막동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미애는 배태곤의 훈계를 듣는 막동에게 “이 사람 말 믿지 마. 다 거짓말이야”라고 말했고, 배태곤에게 충성하는 막동에게 “막동 씨 이 일이 좋아? 배태곤 씨 밑에서 일하는 게 좋냐고?”라고 말했으며, “김양길이나 배태곤이나 다 똑같은 놈들 이래”라고 말했다. 그녀는 부조리 앞에서 기도문을 외운다. 사실 그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므로 종교적 방언에 가깝다. 종교적 방언은 고대 신비종교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었던 현상이다. 공통점은 신으로 말미암은 발성이라는 것. 미애를 연기했던 심혜진은 미애가 문득 기도문을  외운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이창동은 어떤 여자의 실례를 들어 심혜진을 설득했다. 그런데 그 실례는 이창동이 지어낸 허구였다. 미애는 여사제였다.

 막동은 미애가 알려준 진실을 좇아야 했다. 배태곤이라는 메타포.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밤기차는 헤테로토피아로 나가는 길목에서 선회했다. 막동 어머니의 생일을 맞아 온 가족이 나들이를 갔다. 가는 길은 행복했지만 가서는 그렇지 못했다. 가족들은 싸우기 바빴다. 가족공동체는 해체될 대로 해체되어 있었다. 막동은 가족들이 벌여놓은 불화의 난장판, 그 가장자리를 맴맴 돌았다. 뒤로는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배태곤, ‘배태곤’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금기는 금기로 남아있었으므로 헤테로토피아는 없었다. 꿈은 꿈일 뿐이었다.

 막동이 죽고 나서야 그의 가족은 모여 살면서 식당을 하게 되었다. 버드나무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미애만이 그 초록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초록색 스카프를 하고 있었다. 오열하는 미애를 버드나무가 덮쳤다. 그 뒤로는 아파트 단지가 빽빽했다. 배태곤은 인근 아파트로 이사 왔고 미애는 그의 아이를 가졌다. <초록물고기>는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불신 시대”였다. 막동은 순수했고, 그래서 죽었다. 배태곤이 죽였고, ‘배태곤’은 살아 있다. 배태곤이 메타포였듯, 모든 것이 메타포다. 이곳에서 사랑은 메타포다. 여기저기 사랑이 범람한다. 그 사랑은 화폐다. 주는 만큼 받아오고,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을 주고받다가, 어느 정도 쌓이면, 돈으로 바꿔 달라고 줄을 선다. 메커니즘은 상부상조의 미덕으로 포장된다. 듣기 좋은 고양이 소리다.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다. 순수한 사람만 가엽다. 그 사람에게 사랑은 사랑이다. 그 사람은 주어진 사랑을 고스란히 받을 것이다. 부모 자식에게 자랑도 해볼 것이다. 이제 그 사람은 더 열심히 매달릴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상환이 우선이다. 주어진 사랑을 상환하지 않을 때 주어질 사랑은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메타포다. 비단 이곳만이 아니다. 사랑은 드물다. 불신 시대다. 

작가의 이전글 <초록물고기>(1997)―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