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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 Nov 26. 2023

<내 사랑>(2017)

담배 피우는 여자

 <내 사랑>(2017)에는 캐나다 화가 모드 루이스의 삶이 있다. 모드(샐리 호킨스 분)는 테라스 간이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깥으로 난 창문 뒤로는 모드의 숙모와 오빠가 있었다. 모드는 눈치를 살피고 방으로 들어갔다. 오빠가 어머니의 유산인 집을 팔았다고 통보했다. 모드는 자신이 취직해 일할 테니 집을 팔지 말라고 애원했다. 오빠는 네 몸뚱이 하나도 제대로 건사할 줄 모른다고 일축했다.

 모드는 선천적 류머티즘 환자다. 그녀는 관절염으로 다리를 전다. 오빠는 돈 밖에 몰랐고 숙모는 모드를 짐짝으로 취급했다. 집은 팔렸고, 모드는 떠나야 한다. 그날 저녁 모드는 딕비 댄스홀에 갔다. 그녀는 문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짝춤을 추고 있었고 모드는 혼자 춤을 췄다. 모드는 금방 집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려는 모드를 숙모가 막아섰다. 모드는 “친구를 만들러 갔”다고 말했다. “지금 꼴을 봐라”. 숙모가 나무랐다.

 류머티즘은 신체적 장애다. 장애인을 향한 비장애인의 태도는 배제와 배려로 양분된다. 전자는 부정적인 것으로, 후자는 긍정적인 것으로 인지되곤 한다. 그러나 배려는 주체와 타자 사이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위계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자칫 주체와 타자의 동일성을 부정하는 태도가 될 수 있다. 특히 주체성이 강한 장애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탈경계화를 소망한다. 탈경계화는 동일성을 증명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것은 배제와 배려 너머에 있다.


 모드는 주체적인 인물이다. 탈경계화를 향한 모드의 소망은 담배라는 오브제로 드러난다. 담배에는 많은 금기가 따랐다. 제도적으로는 나이가 있고, 문화적으로는 성별이 있었다. 오랜 문화적 관습에서 담배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남성들은 담배를 피움으로써 결속을 다져왔다.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근대성이 여성의 흡연을 이념적으로 금기시해 왔다. 여성의 몸이 니코틴에 취약하다는 의학적 사실이 있었다. 사실 중요했던 건 근대의 여성상이었다. 여성은 국가에 이바지할 건강한 아들을 낳아야 했다. 담배는 그렇게 남성들의 토템이 되었다. 그래서 여성이 담배를 피울 때 그것은 전복적 행위일 수 있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모드는 소외의 순간 담배를 피운다. 모드에게 담배는 타자와의 동일성을 증명하는 탈경계화의 셔레이드인 것이다.

 어쨌든 모드는 떠나야 했다. 어느 날 그녀는 식료품점에서 에버렛(에단 호크 분)을 만났다. 모드는 에버렛이 낸 구인광고 쪽지를 가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에버렛은 모드를 보고 “걸음이 희한하던데 불구예요?”라고 물었다. 모드는 담배를 입에 물고 “걸음걸이만 좀 그럴 뿐”이라고 답했다. 생선 장수 에버렛은 식료품점 주인의 싱거운 농담에 벌컥 성을 냈었다. 그는 사람을 대하는 데 무척이나 서툰 사람이었다. 나름의 사연은 있다. 에버렛은 보육원을 전전했다. 그는 소년의 몸으로 “마당 쓸고 장작 패고 울타리를 세”움으로써 살아남았다. 에버렛의 세계는 각박한 생존 경쟁의 장이었다.

 쓸모로만 가득한 삶이었다. 에버렛은 모드에게 “이 집의 서열은 나, 개, 닭, 그다음이 당신”이라고 말했다. 모드의 쓸모는 가정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에버렛은 바깥일만 하느라 집안에 신경을 쓰지 못했고, 그래서 모드를 고용했다. 모드는 집안일만 하면 되었다. 에버렛은 모드가 가정부 이상이 되려고 할 때 모질게 구박했다. 에버렛에게 중요한 건 노동이었다. 에버렛의 세계는 각박한 생존 경쟁의 장이었고, 그곳에서 살아있음은 살아남음으로 치환된다.


 모드는 주체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에버렛에게 나름의 저항을 시도했다. 모드는 밀린 임금을 지불하라고, 당장 떠나버리겠다고 엄포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포효를 가장한 탄식일 뿐이다. 모드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저항의 싹은 의외의 곳에서 움트고 있었다. 모드는 그림을 그렸다. 소재는 주변 사람과 사물이었다. 모드의 그림이 하나 둘 쌓였다. 에버렛의 오두막이 차가운 단색에서 따뜻한 원색으로 변해가는 만큼, 모드와 에버렛은 가까워졌다.

 <내 사랑>은 모드와 에버렛의 사랑이 촉발되는 순간을 일러 주지 않는다. 아마 그때는 어느 오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에버렛은 모드와 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모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기형이 심한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는 결국 사산되었다. 그때 에버렛의 얼굴에는 연민이 서려 있었다. 모드와 에버렛은 분명 달랐다. 모드는 누구보다 사람을 좋아했고, 에버렛은 누구보다 사람을 싫어했다. 그래서 모드와 에버렛은 소외감을 느끼고 살아야 했다. 모드는 타자가 멀리했고, 에버렛은 타자를 멀리했다.


 어떤 공통분모가 있었다. 모드는 어느새 가정부 이상이 되었다. 모드의 그림엽서는 에버렛의 거래명세서가 되었고, 에버렛의 오두막은 모드의 공방이 되었다. 모드와 에버렛은 교회에서 조촐한 식을 올렸다. 첫날밤 모드는 에버렛의 구두를 디딘 채 춤을 췄다. “낡은 양말 한 쌍처럼 살자”. 모드가 말했다. “한 짝은 다 늘어나고, 한 짝은 구멍 난”. 에버렛이 말했다. “하얀 면양말”. 모드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감청색이나 카나리아 색깔의 양말이지”. 에버렛이 다시 말했다. 낡은 양말은 결핍된 것이다. 그것은 류머티즘으로 다리를 저는 모드, 유년 시절 사연으로 자기 보존에 목을 매는 에버렛을 닮아 있다. 에버렛은 그 낡은 양말에 색을 칠해준다. 이제는 감청색, 카나리아 색이 모드의 쓸모다.

 그런데 모드가 폐기종을 선고받았다. 모드에게 담배는 타자와의 동일성을 증명하는 탈경계화의 셔레이드라고 말했다. 에버렛은 모드의 죽음을 직감하고 말했다.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모드는 “난 사랑받았어, 에버렛”이라고 말하고 죽었다. 에버렛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모드의 공방이었던 오두막에서 곰곰 생각에 잠겼다. 아마 에버렛은 한참 후회에 짓눌려 살아갈 것이다.

 모드는 사랑받았다. 그만큼 입에 무는 담배 개비는 줄었지만 입을 떼지는 못했다. 폐기종이 선고되었다. 세계와의 경계가 지워질 때 즈음 다시 생사의 경계가 그어졌다. 모드의 삶은 무른 떡잎에서 튼튼한 줄기가 서고 기다란 가지가 뻗어 자라는 듯했다. 그 생장은 감탄할만했다. 그런데 줄기가 부러졌다. 줄기의 단면남았다. 패인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누가 죄인인가. 나는 에버렛 옆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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