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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 Dec 04. 2023

<베를린의 연인>(2016)

부유하는 목숨들

  이리나(알바 로르와처 분)는 마케도니아의 어느 작은 마을에 살았다. 그곳에는 양귀비 꽃밭이 있었고, 양 떼가 있었으며, 부모님이 있었다. 이리나는 꽃밭에 누워 있었고, 양 떼를 몰았으며, 부모님과 멱을 감았다. 시내에서는 재봉을 배웠다. 이리나는 그날도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그때 공방 앞으로 군인들이 뛰어갔다. 탱크도 있었다. 이리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이 쓰러져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기도 전에 군인들이 이리나를 덮쳤다. 그들은 그녀를 강간했다. 군인들이 다 떠나고 이리나는 식탁보로 온몸을 덮었다. 부모님은 죽어있었다. 이리나는 한참 절규했다. 어쨌든 도망쳐야 했다. 이리나는 산으로 갔다. 도망치던 중에 사슴을 만났다. 이리나는 그 사슴을 눈에 담았다. 이리나에게 그것은 고향의 마지막 생명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의 종착지는 베를린이었다. 이리나는 베를린의 난민이 되었다. 베를린에서는 마케도니아 내전에 관한 보도가 있었다. 이리나는 TV를 꺼버렸다. 이제 와서 알았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이리나는 베를린의 매춘부가 되었다. 여성 불법 이주자의 상당수는 매춘업에 종사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동유럽 출신 여성이 대표적이다. 이리나는 동유럽 출신 여성 불법 이주자였다.

  매춘은 계약된 강간이다. 매춘부는 몸을 주고 돈을 받는다. 아양을 떨고 비위를 맞춰주면 계약금 이상을 받기도 한다. 중요한 건 포커페이스다. 이리나는 노란 가발을 뒤집어쓰고 홀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녀는 그렇게 나타샤가 되었다. 나타샤는 썩 잘 해냈다. 그러나 광대는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 운다. 나타샤도 손님이 떠나고 난 뒤에 울었다. 어떤 사람은 이리나의 선택을 힐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리나는 동유럽 출신 여성 불법 이주자라고 말했다. 이리나가 가진 것 중 시장에 내놓을만한 건 그녀의 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아나키스트 에마 골드만은 말했다. “몸을 팔면 괜찮은 돈을 벌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하루 여덟 시간 동안 일해서 일주일에 겨우 몇 푼 받는 설거지에 인생을 허비하겠는가?”


  금융치료라는 말이 있던데, 트라우마는 예외다. 이리나는 강간당한 몸을 팔고 있었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자꾸만 현재에 틈입한다. 이리나는 그때마다 시침핀을 허벅지에 꽂아 넣었다. 트라우마 연구의 권위자 베셀 반 데어 콜크는 『몸은 기억한다』에서 셰리라는 여성의 사례를 소개한다. 셰리는 강간, 정서적 부모상실 등 굴곡진 삶을 살았던 여성이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제 피부를 긁고, 잡아 뜯었다. 피가 나도 멈추지 않았다. 셰리는 자해함으로써 어떤 위안을 얻는다고 말했다. 피부의 쓰라림이 비로소 그녀가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었던 것이다.

  통상적으로 인간은 유년기의 기억으로부터 방어 기제를 학습한다. 그때는 배고프다고 울고 춥다고 울면, 젖을 물려주고 이불을 덮어주는 부모가 있다. 그래서 울고 싶을 때 밥을 먹고 이불을 덮는 건 통상적이고 아름다운 방어 기제다. 그런데 트라우마 환자의 방어 기제는 자해다. 그것은 통상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자해의 양태는 트라우마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이리나는 재봉을 배웠다. 그때 시침핀은 재봉사의 도구였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자해의 도구가 되었다. 시침핀이 하나둘 이리나의 허벅지에 꽂힐 때, 그녀의 트라우마가 함께 고정되는 것만 같다.


  쿤데라는 사랑의 만남은 떠내려옴과 건짐의 오래된 신화라고 말했다. 이리나는 베를린을 부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춘부였고 불법 이주자였다. 쫓고 쫓기는 삶이었다. 이리나의 집은 모텔 달방이었다. 어쨌든 이리나는 언제나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는 칼리(빈젠즈 키퍼 분)가 있었다. 그는 개와 함께 거리에서 살고 있었다. 이리나는 자고 있는 칼리에게 이불을 선물했다. 이리나와 칼리는 그렇게 만났다.

  칼리는 부랑자였다. 칼리의 사연은 언뜻 지나가는 그의 말로 짐작할 수 있다. 칼리에게는 가족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칼리에게도, 이리나에게도 고향은 없었다. 부유하는 목숨은 그게 무어든 껴안고 싶은 법이다. 이리나와 칼리는 그렇게 사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칼리는 펑크족이었다. “No Future”는 펑크의 슬로건이다. 펑크는 일면 유아적이다. 칼리도 그랬다. 그는 마냥 현실에서 도피했다. 이리나는 칼리를 잡으려고 했다. 그녀는 칼리의 펑크족 스타일부터 바꾸기로 했다. 새 옷을 사 입히고 머리도 자르고 싶었다. 그러나 칼리는 헤어스타일을 지적하는 이리나에게 화를 내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이리나가 말했다. “뭐든 맘에 안 들면 늘 도망치는 거야?”

  그래도 이리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 집을 구하고 칼리를 불러들였다. 그런데 그곳은 이리나의 집이었고, 나타샤의 업소였다. 손님이 찾아올 때 이리나는 나타샤가 되었다. 나타샤는 칼리의 여자가 아니었으므로 칼리는 집을 떠나야 했다. 그래서 그는 일하기로 했다. 신문배달 일이었다. 칼리는 요란한 장신구를 벗고 출근했다. 그러나 그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이리나는 일이 어땠는지 물었다. 칼리는 그만뒀다고 답했다. 이리나가 말했다. “내 일도 엿 같아. 그 남자들 죽이고 싶어. 하지만 난 일해. 매일 일한다고!”

  아직도 이리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칼리를 데리고 나갔다. 이리나는 칼리와 함께 신문을 날랐다. 그녀는 틈틈이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난 예쁜 옷 만들고 싶어”. 이리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고향은 사라졌지만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꿈은 고향의 조각이었으므로, 이리나는 새 집에 작은 고향을 꾸몄다. 그곳에는 꽃이 있었고, 양이 있었으며, 사슴이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없었다. 칼리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이리나는 칼리를 잡으려고 했다. 칼리도 그것을 바랐을 것이다. 칼리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개는 죽었다. 남은 건 이리나뿐이었다. 칼리가 조금씩 변했다. 그는 머리를 자르고 나타났다. “최고야. 새사람 같아”. 이리나는 무척 좋아했다.

  그날 칼리는 신문을 나르러 나갔다. 날씨가 화창했다. 칼리는 일을 끝내고 이리나와 산책을 갈 셈이었다. 그는 이리나 몰래 재봉틀을 샀다. 그때 이리나는 나타샤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샤의 손님이 죽었다. 나타샤는 죄가 없었다. 그래도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나타샤는 그대로 집에서 도망쳤다. 칼리가 시체만 남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시체를 보고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날 아침 이리나는 전동 부엌칼을 들고 말했었다. “뚱돼지만 하면 돼. 그럼 끝이야. 거시기를 잘라. 그럼 끝”. 불필요한 오해였다. 그러나 칼리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시체를 화장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전동 부엌칼로 토막을 내기 시작했다. 사방에 피가 튀었다. 칼리는 토막 낸 시체를 마대 자루에 눌러 담아 땅에 묻었다. 그는 채식주의자였다.

  경찰이 왔다. 이리나와 칼리는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부검 결과 이리나의 무죄는 해명되었다. 그러나 시신을 훼손·유기한 여죄가 있었다. 칼리는 기소될 참이었다. 칼리의 변호사는 말했다. “거구의 남자를 힘들게 애를 써서 토막 냈어요. 완전 미친 짓이었지만 그 생각밖엔 안 난 거죠. 또 정말 힘든 일이었어요. 정육점 견습생까지 했지만 피를 못 보거든요. 채식주의자고요”. “오직 애인 때문에 한 거예요, 놀랍잖아요?” 변호사는 그것을 “사랑을 위한 범죄”라고 말했다. 맹랑한 변론이었다. 그런데 그 변론이 통했다. 이리나가 유치장에서 나왔을 때 칼리가 있었다. 이리나와 칼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이리나는 마케도니아에서 양 떼를 몰고 있었다. 한낱 백일몽이었나.

  베를린은 대도시다. 대도시에서는 할 일도 많고 갈 곳도 많다. 그러나 이리나와 칼리는 할 일도, 갈 곳도 없었다. 그들은 부유하는 목숨들이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껴안는 것뿐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꿈, 고향의 조각이었다. 칼리의 변호사는 자신의 아내에게 이리나와 칼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알 수 없는 사랑의 힘이겠지”. 아내가 말했다. “그래, 상실의 두려움이거나”. 변호사가 말했다. 어떤 사람은 전체를 붙들고 살고 어떤 사람은 조각을 붙들고 산다. 전체든 조각이든, 붙들고 산다는 건 희망적이다. 하지만 상실의 두려움은 사뭇 다를 것이다. 조각은 부스러기다. 그래도 조각을 붙들고 사는 어떤 사람에게 부스러기는 부스러기가 아니다. 전체를 붙들고 사는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하찮은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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