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현목 씨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늘 나라 제 집앞에 있는 우편함에 편지가 한통 있었습니다. 나도 한때는 시 쓰는 사람들이 죽고 못 사는 ‘릴케’였으나 그것도 세월이 가니 잊혀진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항상 우편함에는 거미줄이나 쳐 있는 신세―하늘 나라에 거미가 있느냐고요? 그건 당신의 상상에 맡깁니다―인데 지구의 극동의 자그마한 나라의, 그것도 서울이면 또 모르지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진례에서 온 편지였습니다.
하얀 종이에 질문이 여러 개 있었으나 눈에 띄는 건 딱 하나였습니다. “나는 왜 글을 꼭 써야 하나?” 핵심을 찌르기는 하는 말이긴 하지만 내가 28살 때인 1903년부터 1908년까지 5년 동안 프란츠 카푸스에게 쓴 편지 속에 답이 다 들어 있어 그가 출간한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나 읽어 보라고 답장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당신은 나이도 칠순이 넘었고 나름 진지한데 그렇게 답하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카푸스에게 한 말을 요약한 거나 마찬가지이니 양지(諒知)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우선 보니 당신은 글쓰기에 대해서 너무 자격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야 나도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지요. 당신이 내게 질문한 것은 여러 가지 있으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카푸스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말한 것,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나?” 그 물음에 “나는 써야만 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의 진정한 시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질문을 당신에게 던진다고 할 때 내가 말한 정답까지는 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글을 안 쓰면 죽을 것 같다라고까지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글을 쓰지 말자고 마음 먹어도 조금은 신경이 쓰이지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글 안 쓴다고 때를 굶을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런 마음인 당신이 굳이 머리 싸매고 고민하면서 꼭 글을 써야 하는지 나에게 물은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카푸스에게 했습니다. 아둔한 당신에게 복습시키는 셈치고 다시 복습을 해야겠습니다. 당신은 외면이 아니라 당신의 고유한 내면의 세계로 침잠해야 합니다. 거기서 시를 쓸 수 있다면 그 시가 좋은지 아닌지 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깥을 신경 쓸 것도 없고 자기 길을 가면 됩니다. 외부의 평판에 기대하지 마세요. 비평만큼 예술작품에 접근하는 데 소용없는 것도 없습니다. 내가 카푸스에게 한 말을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자신의 성장은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뻗쳐나와야 한다. 모든 인상과 느낌의 싹이 자체 속에서, 어둠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속에서, 무의식 속에서,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 속에서 완성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라. 그리고 나서 새로운 명료함이 탄생하는 시간을 기다려라. 이것만이 예술가답게 사는 것이다」
당신은 대학 예과 2학년 때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연 따라 글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눈곱만한 재능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름 노력을 하고 고생했으며 어쩌면 좋게 말해서 우직하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50년 넘게 써 오고 때로는 신춘문예에 몇 번 응모도 해본 모양인데 결과적으로 낙방했으니 심적으로 상당한 열등감을 가진 것 같습니다. 쓰기는 써야겠는데 쓴 것이 언제나 아마추어 티를 내니 자존심이 상한 것이지요. 그런 자격지심의 고민을 나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이미 카푸스에게 말했습니다. 바깥의 평판이나 결과에 목을 매지 말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와 자신의 시적 대상, 예컨대 주변의 사물, 당신의 기억―어린 시절의 기억은 기억의 보물창고입니다―그리고 당신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야생화에 당신의 마음을 침투시켜 하나가 되어 보세요. 할 수만 있으면 야생화가 당신에게 말을 하게 하십시오.
글을 쓰면서 자신의 내면화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고독’입니다. 내가 카푸스 씨에게 당부했습니다.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을 만들어내는 고통을 아름답게 울리는 비탄으로 견디도록 하세요.”, “당신 가까이 있는 것들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의 영역은 이미 별들 바로 밑까지 다다를 만큼 커졌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바로 고독을 출발점으로 삼아 당신의 모든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왜 이처럼 ‘고독’애 대해 강조하는 것일까요? 고독해지는 것은 어렵습니다. 홀로 있어야만 당신의 눈은 더 넓고 깊게 이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 참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마음을 비우고 고요해지면 영명한 지혜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나는 평생 51년 동안 7천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쓴 셈입니다. 카푸스 씨에게 내가 편지에서 말한 사랑과 슬픔과 성(sex)과 신(神)에 대해서 내 생각을짧게 말하면서 오늘의 편지를 마칠까 합니다.
나는 카푸스 씨에게 ‘사랑’은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초심자인 젊은이들은 아직 제대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작업은 배움입니다. 그들은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고독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픔’은 누구나 한 평생 살다 보면 당하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슬픔에 잠겨 있는 동안 가슴 의 많은 것들이 변합니다. 슬픔이 우리의 가슴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의 감정은 입을 다물고, 우리의 내면은 뒤로 물러나고 적막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 적막 한가운데 ‘새로운 것’이 자리잡고 침묵합니다. 우리는 더 조용해지고 더 인내심을 갖고 더 마음을 열고 더 깊어지고,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들은 우리의 운명이 됩니다.
성(sex)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는 성에서의 유희적 성격을 배격하고 진지성과 필연성, 순수성을 강조합니다. 나는 인간의 욕구는 그 본래의 본질에 걸맞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그것을 왜곡시켰습니다. 성의 목적은 번식에 있습니다. 번식을 위한 방편으로 성에 있어서 쾌락을 동반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주객이 전도가 되어 인간은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들이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상행위로까지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음식에 있어서 미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각의 목적은 인간의 몸이라는 육체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이것도 현실적으로 전도가 되어 미각만을 위한 행위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보는 신에 대해 간략히 말하려고 합니다. 나는 신을 기독교적으로 전지전능의 신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예술가들이 작업을 펼치어 미래에 태어날 작품을 통해 나타날 존재가 신이라고 믿습니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의 고민이나 카푸스 씨의 고민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내가 말씀드릴 것은 이것뿐입니다. 깊은 고독 속에 침잠하여 외부 세계에서 무언가 찾으려 하지 말고 내면 세계를 응시하면서 시를 써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 시가 잘 썼느냐 못 썼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당신은 당신이 살아가는 세상과 하나가 되면서 마음에 평안을 찾을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싶습니다. 아참, 이제 생각나네요. 당신은 얼마 전에 「패터슨」 영화를 봤잖아요.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 기사이면서 시를 씁니다. 그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패터슨을 닮겠다고 결심을 했지만 작심삼일이 됐네요. 그 패터슨만 닮아도 됩니다.
쓰다 보니 본의 아니게 「늙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두서없이 중언부언한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남은 여생 건강하시면서 후회 없는 글쓰기 인생이 되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합니다.
모년 모월 모일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