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으로 가는 북촌 골목 한 흰 벽에 모르는 귀,* 귀
가 하나 잔뜩 걸리셨어요 귀만 남으셨어요 바쳐진 소모
의 얼굴들 귀로만 남으셨어요 〈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
리셨어요〉** 진종일 걸리셨어요 젖꼭지도 없이 당신의
젖꼭지를 진종일 빨았으나 무엇 한 모금 넘긴 바 없어요
넘겨주신 거 하나 없이 머언 모래밭 모래알들만 그들의
그늘만 낙타도 한 마리 없이 버석거리게 하셨어요 〈모르
는 귀〉 당신이 듣고 있는 말씀 한 마디도 듣지 못했어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 중이신지 잔뜩 하얗게 걸려 있
긴 마찬가지였어요 〈모르는 귀〉로 잔뜩 밤 샌 새벽 그
간의 내 시편 몇 행行 겨우 읽어 오음五音을 떨게 해 놓
고 내 귀청이 트이는 걸 건드려 놓고 나 오늘은 열심히
네게 가지 않았어요 〈모르는 귀〉, 너만 우거지기 때문이
었어요 나만 지워지기 때문이었어요 오, 무서워요 〈모르
는 귀〉, 잔뜩 지워진 내가 들려요
*〈모르는 귀〉: 정서영의 조각. 2016.8.26. 선재 미술관 오픈
조각가 정서영의 "모르는 귀"는 그의 작품 중 하나로, 요괴의 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 《우주의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 정진규 시집. 2015.3.30. 중앙북스
***“모르는 귀"는 일반적으로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
1 ⓜⓢ로 분석하기
----ⓜ(metaphor) ----ⓢ(statement) ----ⓢ‘(simile)
∙인왕산으로 가는 북촌 골목 한 흰 벽에 모르는 귀,* 귀가 하나 잔뜩 걸리셨어요 ----ⓢ
∙귀만 남으셨어요 ----ⓢ
∙바쳐진 소모의 얼굴들 귀로만 남으셨어요 ----ⓜ
∙〈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 ----ⓜ
∙진종일 걸리셨어요 ----ⓢ
∙젖꼭지도 없이 당신의 젖꼭지를 진종일 빨았으나 무엇 한 모금 넘긴 바 없어요----ⓢ
∙넘겨주신 거 하나 없이 머언 모래밭 모래알들만 그들의 그늘만 낙타도 한 마리 없이 버석거리게 하셨어요 ----ⓢ
∙〈모르는 귀〉 당신이 듣고 있는 말씀 한 마디도 듣지 못했어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 중이신지 잔뜩 하얗게 걸려 있긴 마찬가지였어요 ----ⓜ
∙〈모르는 귀〉로 잔뜩 밤 샌 새벽 그간의 내 시편 몇 행行 겨우 읽어 오음五音을 떨게 해 놓고 내 귀청이 트이는 걸 건드려 놓고 나 오늘은 열심히 네게 가지 않았어요 ----ⓜ
∙〈모르는 귀〉, 너만 우거지기 때문이었어요 ----ⓜ
∙나만 지워지기 때문이었어요 ----ⓜ
∙오, 무서워요 〈모르는 귀〉, 잔뜩 지워진 내가 들려요----ⓢ
----ⓜ(6) ----ⓢ(20) ----ⓢ‘(1)
2 사물의 본질
①’모르는 귀‘는 우주의 한 분이다.
②’모르는 귀‘가 듣고 있는 것은 우리는 듣지 못한다.
③’모르는 귀‘는 나를 지우고, 내가 지워지면 내가 들린다.
3 허름한 단상
‘모르는 귀’는 경산(絅山) 선생의 따님이자 조각가인 정서영님의 조각 작품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 작품을 보고 경산 선생이 영감을 받아 시를 쓴 것 같습니다. ‘모르는 귀’에 각주까지 붙여서 그 ‘모르는 귀’의 근원이 경산 선생의 따님의 조각이라고 일부러 밝혀 놓기 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르는 귀’의 이미지가 긍정적이 아니라 부정적입니다. 구글에서 찾아 보면 ‘모르는 귀’는 일반적으로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저는 ‘모르는 귀’를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부정적 의미보다는 긍정적 의미로 보고 싶었습니다. ‘모르는 귀’는 세상의 온갖 잡사에 대해 귀를 닫고 모른다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 같습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세상에 대한, 혹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오감을 차단하고 자신의 마음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살아가자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경산 선생은 인왕산으로 가다가 북촌 골목의 한 흰벽에 ‘모르는 귀’가 걸렸다고 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소모되다가 이제는 얼굴이 없어지고 귀만 남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좁은 세상이 아니라 우주를 생각하는 존재로서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귀는 솔직히 말해 이해하기 쉽지가 않습니다. ‘젖꼭지도 없이 당신의/젖꼭지를 진종일 빨았으나 무엇 한 모금 넘긴 바 없어요/넘겨주신 거 하나 없이 머언 모래밭 모래알들만 그들의/그늘만 낙타도 한 마리 없이 버석거리게 하셨어요’
억지로 제가 이해한다면 이 정도입니다. 세상의 단맛을 빨려고 빨아댔지만 남는 건 모래알만 버석거렸다. ‘모르는 귀’가 들려주는 진리의 말을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모르는 귀’처럼 세상에 대한 감각을 모두 닫고 경산 선생이 자신의 시편 몇 행을 겨우 읽으니 경산 선생의 귀청이 트였습니다. 하지만 경산 선생은 ‘모르는 귀’에 가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모르는 귀’는 우거지고, 경산 선생은 지워지니 비로소 지워진 즉 대상에서 벗어난 경산 선생이 들렸습니다.
여기서 저는 불교에서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른다는 세 가지 삼매가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공삼매(空三昧), 무상삼매(無相三昧), 무원삼매(無願三昧)입니다. 공삼매는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에 삼매하는 것입니다. 무상삼매는 세상의 모든 형상은 진정한 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원삼매는 세상의 대상에 대해 구하거나 욕심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모르는 귀’는 무상삼매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경산 선생의 의도와는 달리 제가 자의적으로 불교와 연결시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4 외우면 좋을 시구
∙〈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
∙〈모르는 귀〉, 너만 우거지기 때문이었어요
∙〈모르는 귀〉, 잔뜩 지워진 내가 들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