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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소니라고?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다.

by 오월의고양이

저녁식사 후 느슨해져도 될 시간.

휴대폰이 울린다. 031로 시작되는 번호.

받지 말까? 저녁시간인 점을 감안하면 광고나 보험권유는 아닐성싶었다.


ㅂㅎㅅ 맞습니까

네 전데요.

차량번호 6*나 8282 차주 맞으십니까?

무슨 일이시죠?

ㄱㅇ경찰서 교통사고사건담당ㄱㄴㄷ형사입니다.

귀하께서는 접촉사고 후 현장을 벗어나 뺑소니로 고소장이 접수되었습니다.


진짜 보이스피싱? 차량번호에 내 전화번호, 그리고 이름까지?


모 일 모 시쯤 ㅍㄹㅈㅇ아파트 상가 주차장에 차를 세운 적 있습니까?

가물가물했다. 그때쯤 잠깐 세운적 있다고 했다. 니라고 할까는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대답이 저절로 나온다. 보이스피싱을 아닌 거 같다. 그나저나 내가? 아님 남편?

ㅂㅎㅅ씨가 직접 운전했습니까?

남편이 어요. 함께 있었고요.


접촉사고 후 사후처리 없이 현장을 벗어나 6*나 8282 차주 ㅂㅎㅅ씨를 뺑소니혐의로 고소이 접수됐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단 조사가 필요하니 경찰서 출석을 명 한다. 경찰서출두라니...

접촉사고라니... 뺑소니라니...

기억을 더듬어보자.

심장이 벌렁벌렁 콩닥콩닥대는 소리가 몸밖까지 들린다.

신경 쓰지 마.

보면 알겠지.

덤덤해 보이는 남편이 낯설다.


은퇴한 후 주말에만 차를 이용한다. 차된 상대차 문콕이 염려되 몸을 얇게 펼쳐 빼내는 성격이다.


형사가 언급했던 그날의 기억을 되짚어 봤다.

상가 2층에서 볼일을 보고, 내려왔는데 차 뒤쪽 맞은편 주차라인도 아닌 장소에 차가 세워져 있다. 남편이 밀어 보았지만 끔쩍도 안 했다. 번도 사고를 낸 적 없는 베테랑 운전경력의 남편이 길이를 가늠하더니 어쩌면 가능하겠다며 뒤에서 살피라고 했다. 남편은 10cm씩 전진 후진을 반복하며 수 십 번을 꺾었다. 그때마다 대형 세단의 바퀴는 좌로 우로 꺾어졌다. 나는 심지어 두 차사이에 끼어 탕탕 두드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다. 주차라인도 아닌 곳에 버젓이 세워두고 기어를 중립으로 하지도 않는 개념 없는 운전자 궁금했지만 으로만 흘기고 돌아왔다.


20대 후반정도나 됐을까? 힐끗 쳐다보고는 무심하게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좁은 사무실에는 창문 쪽에 두 개의 책상이 놓여있고 출입구 오른쪽에 정수기와 믹스커피, 종이컵등이 배치되어 있다. 쪽 벽면에 의자가 두어 개 있고, 초등학교 책상크기만 한 테이블이 그 앞에 놓여 있다. 티브이에서 보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널찍한 사무실과 취조실, 심문하는 형사, 범죄혐의를 부인하는 사람등 복작할 거라는 추측을 했었다. 형사가 소개하자 휴대폰청년은 다시 힐끗 쳐다본다. 리고는 다시 시선은 휴대폰으로 향한다. 인사 좋아하는 나일지라도 그 상황에서는 오버다.

형사가 잠깐 자리로 간 사이에 휴대폰청년에게 물어보았다.

제 차가 박은 거 맞아요?

네!

보셨어요?

네! 제가 차 안에 있었거든요.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있나?

아니 무슨 차를 그렇게 대 놓은 거죠. 우리가 그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요? 우리가 그쪽차를 밀었었는데 차 안에 있었다고요?-선팅 된 차 안에 사람 있을 거라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그걸 그냥 보고 있었다고요?

나도 모르게 흥분되고 있었다.

그래서 박았잖아요.

표정변화도 없이 내뱉는다.

아니요. 안 박았어요.

박았어요오.

블랙박스에 다 찍혔어요. 느물거리며 입을 씰룩한다. 내가 이상한 건가?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지? 지 차가 긁혔으면 화를 내거나 뭐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가? 참으로 별나다.


그때 형사가 우리를 컴퓨터 앞으로 불렀다.

이게 화면상으로는 분명치가 않아요. 박았다고 하면 그래 보이고 또 아니라면 또 그런 거라... 그래서 오시라 한 겁니다. 차 가져오셨죠?

블랙박스 영상을 보여준다. 흑백영상 안에서 내 차는 앞으로 뒤로 들어갔다 나갔다 반복하고 있다. 그때의 상황이 떠올라 다시 이 뻗친다.


어떤 여자분도 지나면서 차를 쾅쾅 치더라고요. 내 차랑 부딪히니까 알려주는 거죠.

어떤 여자분 누구요? 그때 아무도 안 지나갔거든요.

여기요. 보이죠?

영상에서 어떤 여자 하나가 우리 차 트렁크 위를 손바닥으로 치고 있다.


이거 바로 나예요. 간격 알려주다 두 차 사이에 끼였거든요. 래서 친 거라구욧!

표정이 살짝 흔들린다.

아... 차가 움직였다고요. 분명히...

내가 끼이면서 그 차도 건드렸다보죠오.

짜증이 확 난다. 뭐 이런 개뼈다귀 같은 놈이 다 있어.

차 안에 있었다면서요. 와서 말했어야죠. 어이가 없네...

남편이 내 팔을 잡는다. 만하라는 신호다.

제가 나와보니 벌써 떠나고 없더라고요.

'얘가 도대체 뭐라는 거야? 몇십 번 들고 날고 했다고!! 심지어 차를 빼고 나서도 니 차보며 어이없어 남편이 타라고 할 때까지 서 있었는데.'


두 차 모두 주차장에 있지요? 자 가시죠.

형사는 쇄된 A4용지 몇 장과 줄자를 손에 들고 있다.

그럴 리 없는데도 불안하다. 이놈의 경찰서는 멀쩡한 사람도 범법자이 졸게 하는구나.


문제의 회색 소나타는 우리 차와 가까운 쪽에 세워져 있다.

두 차 사이에서 셋은 형사의 움직임을 따라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형사는 묵묵하게 우리 차와 청년의 차를 오가면서 자로 재어보고 서류를 살펴보고 다시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잠시 후, 형사는 청년의 차가 있는 곳에서 우리를 불렀다.

자 보세요. 이 차는 여기가 긁혔다고 주장하는 거고요.

우리 차 쪽으로 갔다. 셋은 따라갔다.

차(우리 차)는 그 높이에 어떤 흔적도 없어요. 부딪혔다면 당연히 긁힘이던 하다못해 희미한 줄이라고 있어야 해요. 피해차량정도로 긁혔으면 흔적이 없을 수가 없어요. 해가 됩니까?

청년을 보면서 묻는다.

아, 진짜로 부딪혔다고요! ㅆㅂ

욕하지 마시고요. 지금으로는 입증할만한 것이 영상과 실물대조밖에는 없잖아요.

주차라인에 세운 것은 맞아요?

청년은 말이 없다.

내가 말이 많아진다.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왜 거기다 세워둔 거예요. 거기는 주차라인도 아닌데..

주차라인 맞거든요.

헐...

불법주차잖아!

남편이 다시 내 손을 잡는다.

어쩌실래요? 고소를 계속 진행하시겠어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덤덤하고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형사가 말했다.

진짜 박았다고요!!!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더니 획 자기 차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ㅂㅎㅅ씨는 라가서 진술서 한 장 작성해 주시고 가셔야 합니다.

진술서라고요? 왜요?

ㅂㅎㅅ씨가 목격자라서요. 형식적이긴 하지만 작성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무실에 놓여있던 작은 책상 위에 A4용지 한 장과 모나미볼펜 한 개를 놓아준다

A4용지에는 내 신상을 적는 란과 사건당시 목격한 상황에 대한 질문이 제법 빼곡하다. 같은 질문 같은데 다른듯하다. 아... 주관식 서술형 싫어. 난감해하는데 형사가 나서서 조목조목 여기는 이렇게 쓰세요 알려준다.


남편은 형사에게 고생하셨다 인사를 전했다.

아이고 제가 죄송하죠.

요즘 이런 고소고발이 부쩍 늘었어요. 렇게 간단하게 끝난 것도 다행이지요. 실물을 보고 줄자로 떡 확인시켜 줘도 바득바득 우기고 윽박지릅니다. 래도 저 청년은 순순히 돌아가서 다행이네요. 세상이 어째 점점 더 각박해지네요. 툭하면 고발, 고소... 아주 죽겠습니다.


커피 한 잔 셔도 될까요? 믹스커피로 눈이 향하는 내게 기꺼이라는 손짓으로 정수기를 가리킨다.

믹스 한 개를 종이컵에 털어 넣고 온수를 눌렀다. 정수기 위의 푸르스름투명 프라스틱통 안 물방울이 몽글리며 쿨럭댄다.


지난밤 한숨도 못 잤다.

어쨌거나 무혐의?로 벗어나고 나니 오는 길 남편과 수다리가 생겼다. 로 고소자 험담이다.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애환까지...


칼국수 먹고 들어가자. 칼칼한 걸로... 남편의 표정이 밝다. 혐의 없지만 혐의 없음으로 종결되어 편해진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사건당사자(남편) 대신 목격자인 내가 주로 잘잘못을 따져 묻고 흥분했구나.

너는 쫌... 흥분 좀 하지 마라 응? 우아하게 응? 네가 그러니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알았어 알았어.

앞으로 경찰서는 운전면허증갱신등 민원실만 이용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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