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과 천국을 오간 소도시 여행
일본 가가와현 다카마쓰 3박 4일 여행기 (시부모님, 남편과 아주머님, 아기곰 삼 남매까지 총 8명)
첫째 날: 호텔 도미인 핫스프링 중앙공원점-마루가메마치 거리 핼러윈 축제
둘째 날: 나오시마섬 지추미술관-베네세뮤지엄-클레멘트 호텔 저녁식사
셋째 날: 고토히라궁 우동학교-사케박물관-마메하나 화과자 만들기-유메타운 쇼핑
넷째 날: 다카마쓰 중앙공원 플리마켓 축제-현대미술관-마루가메마치 오니기리 축제-줄다리기 대회-회전초밥
시어머니 칠순으로 일본 가족여행을 가다니!
그런데 도쿄, 오사카 대도시를 놔두고, 소도시 다카마쓰 여행이라니 ㅜ.ㅜ
2008년에 가봤던 세련된 도쿄와 오사카가 어떻게 변했는지 너무 궁금했는데, 20대 청춘시절에 몇 달씩 일본 자전거 여행을 했던 남편은 한 치의 양보가 없었습니다.
입이 삐죽 나오고 마음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다카마쓰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도 나의 징크스가 또 발현되었습니다. ㅜ.ㅜ 여행을 3일 앞두고 남편과 아이들이 기관지염에 걸렸고
3일 동안 수시로 가족들의 음식과 약을 챙기다가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나의 체력은 고갈되었습니다. 다카마쓰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그릇으로 운반되는 중간에 설거지 통에 잘못 떨어진 부침개처럼 축 늘어졌습니다.
다카마쓰 호텔, 도미인 핫스프링 중앙공원점에 도착.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 비좁은 공간을 바라보는 나의 피로는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남편에게 화가 폭발하기 시작했고, 화를 내지 않기 위해서 입을 꼭 다물었습니다.
하필이면 일본은 대만에 상륙한 태풍 콩레이의 영향으로 강한 비가 쏟아집니다.
저는 혼자 마음속으로 제게 주문을 겁니다. '반드시 의미가 있다, 반드시 의미가 있다, 반드시 의미가 있다'
첫째 날 저녁시간에 걸어 다닌 마루가메마치 거리는 온통 핼러윈 축제입니다. 리얼하게 분장한 젊은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푸릇한 에너지가 부럽습니다. 한 가지 이상한 건 사람들의 분장에 비해서 분위기는 정말 차분하다는 겁니다. 거리에 음악소리도 거의 없고, 사람들 말소리도 우리 가족 8명의 목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합니다.
둘째 날 호텔 조식을 먹는데, 감탄 또 감탄입니다. 아니, 이렇게 맛있다니. 이렇게 비좁은 시설의 호텔 식사가 이렇게 맛있다고?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꺄악, 반드시 의미가 있구나^^'
다카마쓰 항구에서 페리호를 타고 나오시마 섬으로 이동합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데 왜 지난 5월 말의 울릉도 독도 여행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울릉도 여행 하늘이 딱 이런 회색이었고, 하늘을 비추는 바다도 같은 진흙탕 색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나오시마 섬에 도착하자마자 강한 비가 내립니다. 가족들은 각자 우산을 쓰고 멀리 떨어져서 걸어갑니다.
처음 도착한 지추미술관.
안도 다다오의 제주도 유민미술관, 수풍석 뮤지엄을 여러 번 가봤기 때문에 느낌이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고 도착했는데, 전시장에 걸린 모네 그림의 위용에 온몸이 굳어버립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도 대형 작품이 많아서 여러 번 봤는데, 모네 그림을 바라보는 제 몸에 소름이 돋고 감동에 눈물까지 나옵니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 설계가 모네 그림을 우주처럼 경외롭게 만든 건지, 모네 그림이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빛내고 있는지, 평범한 저는 알 수 없지만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빛이 얼마나 강하고 절대적인지 그 힘을 보여주는 전시회인 것 같아요.
빛의 모호함 앞에서 저는 무방비상태로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물을 이렇게 뚜렷이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빛의 힘이며, 빛의 자비 없이는 제 눈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전시였습니다.
나오시마 섬에서 나와 다카마쓰 항구에 도착하자, 대단한 폭우가 내립니다. 지혜로운 남편은 항구 가까운 호텔에 저녁식사를 예약했고, 유리창 밖에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가족 모두 달콤한 저녁식사를 합니다.
'초밥이 없다니 ㅜ.ㅜ' 마음이 상했지만 디저트 종류가 얼마나 맛있는지, 우리 테이블 위에 빈 접시가 수십 개 쌓여갑니다.
셋째 날 다카마쓰에서 지하철로 1시간을 이동하여 고토히라궁에 도착합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신사는 못 갔지만 우리 가족은 우동학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BTS 음악에 맞추어 광란의 댄스로 반죽을 하는 클럽타임을 잊지 못할 거예요. 단조로운 밀가루 반죽도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탬버린을 흔들면 나를 해방시켜 주는 의식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저는 이미 다카마쓰의 매력에 풍덩 빠져버렸습니다. 아이들과 아이스크림을 계속 사 먹고, 편의점에 들어가서 마주치는 귀여운 오니기리 앞에서 마치 사람과 인사를 하는 것처럼 입이 귀에 걸리도록 미소를 지었습니다. 시간아 천천히 흘러가라, 시간아 천천히 흘러가라
마메하나 공방에서 일본 화과자 수업을 하는데, 가격이 비싼 것 같아서 저는 순간 비 맞은 물만두처럼 축 처졌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네는 상냥한 공방사장님의 모습에 일본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던 아이들의 마음이 풀어졌고, 사람들의 마음은 겉모습을 넘어선다면 모두 이어져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일본에 내리는 비는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족은 각자 우산을 쓰고 서로 거리를 둔 채 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우산의 넓이만큼 서로 떨어져서 걷는 그 시간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면서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다카마쓰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집니다. 파란 하늘, 밝은 햇살. 중앙공원에 펼쳐지는 플리마켓 축제. 마루가메마치 거리에서 열리는 오랜 전통의 줄다리기 대회, 오니기리 축제. 수십 개의 접시를 비운 회전초밥집.
80년이 넘은 오래된 빵집 춘풍당에서 구입한 프렌치토스트는 4일간의 다카마쓰 여행을 슈가파우더 향기가 가득한 추억으로 봉인합니다
거리에 갖다 놓은 피아노로 달려가 삼 남매가 각자 연주를 합니다. 첫째 곰의 헝가리 무곡, 둘째 곰의 플라워 댄스. 아이들의 연주를 듣는데 눈물이 납니다. 중1 첫째 곰과 초5 둘째 곰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온갖 짜증과 침묵, 알 수 없는 언어들로 엄마와 벽을 만드는 중입니다. 아이들이 무언가 잘못한 게 없기 때문에 야단을 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잘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칭찬도 할 수 없는 애매한 하루하루.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뒤에서 하염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크게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요즘입니다. 맛있는 밥과 간식을 챙겨주고,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물어봐주는 엄마라는 자리. 엄마 아빠가 너희들 뒤에 서 있다는 걸 어쩌다 느끼면 그걸로 나는 잘 해낸 거라고 제 자신을 토닥입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시부모님의 여유로움. 온갖 경험과 성공, 실패를 거듭한 두 분의 모습은 큰 산과 같습니다.
시어머니의 칠순을 기념하는 가족여행이었지만 어머니는 이번에도 쉬지 못하고 가족들을 계속 챙깁니다.
이번 여행을 기획하고 준비한 남편은 특유의 유머로 가이드로 빙의하여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는데, 이 무뚝뚝한 가족들은 남편의 설명은 듣지 않고 각자 딴청을 합니다. 가이드의 안내도 듣지 않는 우리가 가족 구성원의 설명을 들을 리가 없습니다.
도쿄와 오사카로 가고 싶었지만, 생소한 도시로 가게 되어 출발할 때까지 남편에게 무척 서운했던 소도시 다카마쓰 여행.
우리가 머무는 모든 곳에 의미가 숨어 있었던 특별한 소도시 다카마쓰 여행.
여행 내내 비가 내렸지만 우산의 넓이만큼 가족들과 조금씩 떨어져서 걸어 다녔던 조용한 힐링 여행.
안도 다다오와 모네가 만나는 장면이 생애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는 특별한 경험
춘풍당의 바게트 프렌치토스트의 고운 슈가파우더가 눈이 되어, 다카마쓰역 크리스마스 트리에 흩날린 여행.
모든 여행이 제게 말합니다.
"반드시 의미가 있다."
"반드시 의미가 있다."
잘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고맙습니다.
맘디터의 일본 소도시 다카마쓰 여행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