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00원짜리 음료보다 더 고마운 건
이사한 지 한 달쯤 됐다. 짐은 얼추 정리됐지만, 동네는 아직 낯설다. 매 주말마다 일정이 있었고, 이사 이후에도 제대로 쉬지 못했던 터라 주말이 여유롭다 느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아무 계획 없이, 우리끼리 조용히 시간을 보내게 됐다.
날씨 좋은 주말, 가족들과 뭘 할까 고민하다가 동네 산책을 해보기로 했다. 한참을 걷다가 넓은 잔디밭에 들러 아이들과 연날리기도 했다. 낯선 동네,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 우리가 평소처럼 주말을 보내고 있다는 게 새롭게 느껴졌다.
나는 마법기간 중이라 몸이 조금 무겁긴 했지만, 크게 예민하지도, 특별히 힘들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공원에서 한참 놀고, 이제 슬슬 집에 가려던 참에 남편이 카페에 들르자고 했다. 그는 곧바로 주저 없이 눈에 보이는 아무 카페에 들어가서 메뉴를 고르고 내게 말했다.
“자기 이것 봐, 진짜 맛있어 보인다. 이거 먹어봐. 베스트 메뉴래. 다른 거 먹고 싶은 건 없어?”
그 말투가, 태도가 이상하게 낯설고 또 고마웠다. 그렇게 받은 음료와 디저트를 먹으며 자연스레 기분이 풀렸고, 표정이 달라졌나 보다.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아까 자기 당이 딱 필요한 몸처럼 보여서. 그래서 그냥 들어가자고 한 거야.”
나는 평소 가족 안에서 중간자 역할을 자주 맡는다. 누군가 기분이 나빠지지 않게 상황을 조율하고, 필요하면 분위기를 맞추는 편이다.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렇다. 느끼고 싶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감정이 잘 느껴지는데, 그게 장점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꽤 피로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내가 있는 자리에 불편함이 생기면 민감하게 반응하고, 혹시 그게 나 때문은 아닌지 조심스러워질 때가 많다. 그래서 더 애쓰는 날이 많았고, 그런 방식이 익숙했다. 그런데 어제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내가 느끼는 대로 움직였고, 굳이 맞추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편안했다. 그냥 그렇게 흘렀고, 괜찮았다. 남편은 평소에 말이 많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해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누구보다 조용히 잘 돌보고 있다는 걸 종종 느낀다. 어제처럼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행동으로 먼저 보여줄 때가 있다. 그의 다정함은 오늘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나는 어제의 경험으로 알게 됐다.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괜찮을 수 있다는 걸.
괜찮은 척 안 했더니,
오히려 괜찮았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