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jörk 비요크 [Post], [Homogenic]
나는 운이 좋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끼인 세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의미이다. 공중전화박스, 손 편지, 전봇대 연락판, 턴테이블로 대변되는 아날로그 감성의 본바탕 위에, XT 컴퓨터, 채팅, 사이버 스페이스, 컴퓨터 그래픽으로 예를 들 만한 디지털의 수혜를 모조리 흡수했기 때문이다. 양쪽의 좋은 점만 취사 선택하여 야곰야곰 까먹고 있으니 이것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물론 부모 세대, 현세대를 비교하는 발언은 아니다. 나 자신이 이런 지경을 꽤 만족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와 연계하여 Björk 비욕의 음악을 표현하고자 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발란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일렉트로닉 바디와 현악기의 실루엣이 서로의 몸을 쓰다듬으며 만들어내는 음악적인 융화에 있다. 개인적으로 매우 낯이 익고 친근할 수밖에 없는 주제인 것이다. 그리고 Björk은 자신의 음악에서 이 도구를 가장 잘 사용하는 음악인 중의 한 명일 것이다.
1993년 [Debut] 앨범 이후 30년이 지났다. 초기 일렉트로닉 팝이라고 카테고리 지었던 것도 이젠 낡은 이야기가 되었다. 음악적으로 어떻다고 얘기해야 할지 이젠 고민스러울 것이다. Björk 비요크의 행보를 따라가자면, 꿈 많은 변방 소녀가 험한 산꼭대기에서 사자후를 내뿜은 후 직접 레드 카펫을 깔아가며 달려 나가는 느낌이 떠오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깔아가는 것이다. 남의 평판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 자신이 이미지를 만들고, 즐기고, 선도해 나간다는 데 방점이 있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2000년대 이후 여러 실험적인 모습으로도 두드러진다. 내게 그녀의 시절은 [Debut]부터 4집 [Vespertine]까지 한 파트, 그리고 5집 [Medúlla]부터 가장 최근의 2022년 10집 [Fossora]까지 한 파트로 나뉜다. 그만큼 2000년대 이후 그녀의 앨범에는 변화가 많다. Radiohead 라디오헤드가 [Kid A]부터 하늘로 날아오르려 했던 성향과 비슷하다고 예를 들어볼 수 있을까?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겹겹의 레이어로 앨범을 만든다거나 ([Medúlla] 2004), 음악을 인터랙티브한 시도로 표현한다거나 ([Biophilia] 2011), 그녀 자신이 정의하는 유토피아를 허공에 떠 다니는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Utopia] 2017) 대중의 기대보다 항상 한 발 앞서 나간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는 무엇을 꾀할 때 전혀 주저함이 없어 보인다.마치 이런 태도 같다. ‘나는 지금 이것에 관심이 있어. 그래서 이것을 당장 할 거야. 내겐 주저할 시간이 없어.’ 그리고 나는 그녀가 이렇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 작품을 좋아하겠지, 누군가는 싫어할 거야, 누군가는 관심조차 없을 테고. 상관없어. 처음부터 모두가 좋아해 주는 것 따윈 바라지도 않았어.’ 뭐 그런 뉘앙스 말이다. 이런 이미지는 패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매번 쇼킹한 패션과 새로운 이미지를 안겨주는데 주제의 한계가 보이지 않는다. 이젠 슬슬 진부해질 만도 한데 범인의 시각을 가뿐히 넘어버리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2015년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서 그녀를 테마로 기획전시를 했던 것은 그간의 발자취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전시 내용은 혹평을 받았지만 말이다.
I’ve been doing this since I was 11. And people have hated me, found me weird, loved me.
You see, I’ve learned not to rely on all those different emotions.
저는 11살 때부터 이 일을 했는데, 사람들은 저를 싫어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여기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그 모든 감정에 의존하지 않는 법을 배웠어요. (1995년 Spin Magagine)
누군가는 그녀의 음악을 실험적이다, 선구적이다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거고, 누군가는 심드렁해할 것이다. 나 역시도 앨범의 다양성만큼 다층적인 평가를 가지고 있다. 역시 각자 보고 듣는 이의 마음에 맡길 일이다. 그래서 Björk은 개성이 강한 후기작에 앞서, 2집과 3집 초기작을 우선 접하고 맘에 든다면 그 이후의 행로를 가져가는 게 적당한 순서로 보인다. 1집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녀 음악의 정체성이 100% 발현되기 전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만든 곡으로 빼곡히 채운 1집 [Debut]의 시작은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린이가 중첩되는 모호한 얼굴, 신비롭고도 옥타브를 넘나드는 목소리, 아이슬란드 발 음악이라는 특수성까지 말이다. 이후 그녀는 2집에서 여러 음악인들의 지원을 받아 일렉트로닉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그녀의 머릿속에 든 아이디어가 개성적인 지인들이 쌓아 올린 비트와 만날 때의 카타르시스는 충분한 청량감이 있었다. 여기서 그녀는 한 발 더 나아가 또 다른 텍스처를 음악에 올린다. 현악 편곡으로 기계적인 사운드를 감싸 온기를 입힌 것이다. 그녀의 자아 가득한 일렉트로닉 팝 2집 [Post]의 탄생 순간이었다. 신의 한 수였다. 그리고 이 절묘한 조화를 한 바퀴 더 밀고 나간 것이 3집 [Homogenic]이다. 어느 앨범이 더 좋다라고 하는 것은 각자 다르겠지만 둘은 매우 비슷한 성향을 지녔다. 그 당시도 혁신적이었지만 지금 들어도 이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이 시기는 시도해 보고픈 에너지도 대단해서 다양성이 넘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Army of Me>의 다크 한 베이스리듬을 지나고 난 후 <It’s oh So Quiet>의 뮤지컬을 받아들여야 하니 말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만남이라. 일렉트로닉의 새로움과 현악의 아찔한 날아오름,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다른 차원을 열어주는 대표적인 곡으로 [Post] 앨범의 <Hyper-Ballad>를 꼽고 싶다. 그녀가 달려 나가고 싶은 세계가 눈앞에서 펼쳐지노라면 때론 눈시울이 찡해진다. 그러나 이번에 링크로 선택한 곡은 [Homogenic]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All is Full of Love>로 정했다. 그것도 앨범 버전이 아닌 기계적인 비트를 믹스한 뮤직비디오 버전 (Video Edit)이다. 음악을 듣는데 상상력을 제한하는 느낌이어서 개인적으로 뮤직비디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는 그간 그녀가 표현에 있어 음악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것을 융합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즉, 이 뮤직비디오는 그녀가 자신의 음악을 이 그릇으로 받아주었으면 하는 제안과도 같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잡아보아야 할 필요가 충분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녀는 또 다른 비디오아트의 천재 Chris Cunningham 크리스 커닝햄을 섭외한다. 아마 그녀의 작품 중 유명한 걸작일 것이다.
문득 요즘 인공지능 시대에 이 뮤직비디오는 다시 한번 빛을 발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로봇 간의 사랑이라니 말이다. 인공지능이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라는 화두가 연상되지 않겠는가. 물론 이런 주제가 그 당시 처음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신선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소령은 뇌의 일부가 남아 있는 상태로 전뇌화를 했다. <총몽>의 갈리는 인간의 뇌와 가슴이 남은 상태로 발견된다. 반해 뮤직비디오의 로봇은 인간적인 무엇이 없는 완벽한 기계육체에 생명적인 어떤 것을 부여한 것이다. 현재 AI 시점에서 이 레벨은 요원해 보인다. 아마 인간의 감정을 시뮬레이션하고 모방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단언하겠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 어느 미래.
그녀는 반박자 느리게 노래하며 천천히 생명을 밝히는 시간을 표현한다. Uncanny Valley를 아슬하게 넘나들고 동성애의 미묘함까지 살짝 더해 차별점을 만든다. 자아를 마주하는 자신. 천상으로 펼쳐지는 듯한 목소리는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랑을 로봇에까지 스며들게 하고 싶었던 걸까.
그녀의 손짓이 있다.
뇌에 비틀어 새겨지는 시간은 여전히 유효하다.
Björk [Hoomogenic] 1997년 <All is Full of Love (Video Edit)>
https://youtu.be/9JE6rUwfckI?si=MFsaCJWWKQv-28I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