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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좋아서] 당신이 좋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가장 좋아한다'는 뭘까? 나는 왜 그 영화를 좋아할까?

by Cho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예요?"


선뜻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인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예요?"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냐 묻는다. 매번 그 어려운 질문에 "음... 글쎄요. 최근 봤던 영화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은 작품은 있어요."하고 답한다. 질문에 숨겨진 '지금까지 본 작품 중'의 범위를 '최근 본 작품 중'으로 멋대로 바꿔서 말이다.


어떻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고를 수 있을까? 쉽사리 하나를 택하지 못하는 일명 '결정 장애'에게 있어 가장 좋아하는 한 가지를 택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그건 선택지 속의 모든 것으로부터 장점을 보기 때문은 아닐까 변명해 본다.


그도 그럴 것이 '좋아하는 영화'는 너무도 많다. 어릴 때 텔레비전 영화 채널에서 자주 방영되던 <미이라> 시리즈는 이집트 문명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터미널>은 아직도 정확히 이유를 모르겠지만 삶이 고될 때면 찾게 되는 영화다. <콘스탄틴>은 보고 또다시 봐도 볼 때마다 더 좋아지는 영화다. <리틀 포레스트>는 밥조차 먹기 힘든 때가 오면 마음을 위해 찾는 영화다. 홋카이도 여행 전 여행지의 영화를 보고자 찾아본 <러브레터>는 빛나지 못한 애틋함에 겨울이면 다시 생각나게 만드는 영화다. <소울>은 가볍게 여기던 일상에 리듬을 더해준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일상 속 빛을 찾아준 영화다.


이렇게 좋아하는 영화로 하루 종일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고를 수 있겠는가. 평생 살아오면서 본 영화가 몇 편인데!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예요?"라는 질문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처럼 어렵게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영화를 '충분히' 좋아하고 있는 걸까? 수많은 영화들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고르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심지어 어릴 적부터 좋아한 몇몇 영화들은 왜 그 작품이 좋은지 이유조차 명확히 대지 못한다. "왜 그 작품이 좋았어요?"라는 질문에 의사소통 능력이 한없이 퇴화하기라도 한 것 마냥 "모르겠어요... 그냥 좋아요."라고 답할 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릴 적부터 좋아한 것들은 모두 자세한 이유보다는 잠시의 '인상', 그러니까 그때의 느낌과 감정 때문이었다. 고양이를 처음 좋아하게 된 이유는 아마 친절한 동네 고양이씨가 허락해 줬던 폭신한 털의 촉감 때문이었다. 비 오는 날이 좋은 이유는 비 온 뒤 촉촉하게 젖은 풀내음 때문이다.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무뚝뚝한 자상함 때문이었다.


그렇게 반복해서 보다 보니 좋아함이 커지고 커져 장점들이 더욱 눈에 들어오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장점들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너무 많은 장점을 두고 한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인상만이 켜켜이 쌓여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남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굳이 세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를 좋아한다면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도 하나 고르지 못하고, 어릴 적부터 좋아해 온 영화가 왜 좋은지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서 만나온 영화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수많은 영화들로부터 새어 나온 빛이 하나로 모여 나를 만들어 간다. 그래서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영화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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