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서 건진 단상
어제 내린 눈을 잔뜩 이고 있는 나무들에 불어 치는 거센 바람으로, 나뭇가지가 춤을 추고 나무에 쌓인 눈이 흩날린다.
거실 창밖으로 겨울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난날들이 문득 떠오른다.
무척 추웠던 겨울. 큰 이모댁에서 얻어온 솜털이 채워진 선명한 노란색과 검은색 줄무늬 파카를 걸쳐 입고 거리를 나섰다.
새 옷은 아니지만 처음 입어보는 제대로 된 겨울외투가 좋았고 늘 어두운 색의 옷만을 입던 내가, 옷의 주인이었던 사촌형의 패션 감각 덕분에 화려한 색의 옷을 입으니 기분도 밝아진 듯했다.
그때는 잦은 이사 때문인지, 나의 성격 때문인지 주변에 친구가 별로 없었다.
밝은 색의 겨울외투를 입고 괜스레 동네를 배회하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이끌려 소리의 진원지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집에서 출발해 좁은 골목길을 구불구불 걷다 보면 갑자기 오른편에 제법 넓은 논이 나타나곤 했는데, 겨울이라 꽁꽁 얼어붙은 그곳에서 아이들이 썰매를 타거나 팽이를 굴리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아무도 나의 새롭게 걸쳐 입은 옷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인지, 순간의 기분 좋음도 오래가지 못하고 차가운 바람에 곧바로 얼어붙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장남인 나는 집안의 형편을 고려하여 새 옷을 사달라고 주장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입던 옷을 주워 입었다.
친구들은 노티가 난다며 가끔 놀리기도 하였지만, 나로서는 옷을 멋지게 입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크게 괘념치 않았다.
그해 겨울. 하루는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던지 어머니가 나를 이끄시고 시내로 나가 제법 비싼 외투를 사 입히셨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진한 감색의 두툼한 새 외투가 너무 좋아 공작이 아름다운 꼬리를 활짝 펴고 뽐내듯 한동안 어깨를 잔뜩 펴고 다녔지만, 그 기쁨도 잔뜩 쌓인 눈이 녹아내리듯 사라져 갔다.
뒤돌아 보면, 나의 옷에 대한 강요된 무관심 때문인지, 아내나 아이들에게도 비싸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지 못하고 싸고 무난한 옷만을 입혔고, 지금까지도 옷에는 투자를 잘하지 않는 가족이 되게 하는 원흉이 되었다.
이제 나이 드셔 힘이 많이 빠지신 부모님이 설날 연휴를 함께 하신다고 서울에 올라오셨다.
기차역에 마중 나가 부모님을 뵈었을 때 예전의 모습처럼 전혀 눈에 띄지 않는 무채색의 간소한 옷을 입고 나타나시는데, 평소 같지 않게 가슴이 문뜩 아려옴을 느꼈다.
브랜드는 알 수 없지만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시는 노인들과 대비하면 나의 부모님은 그야말로 초라하고 왜소하게 보였기 때문인 듯했다.
함박눈이 쏟아지고 칼바람이 매섭게 부는 기차역을 벗어나 줄줄이 걷는 부모님, 아내, 나의 모습이 이날처럼 초라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배움이 많지 않으시지만 투박한 언어로 올바르게 사는 인생을 강조하신 부모님들의 삶을 이어받아, 나 또한 화려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된 삶을 살고자 노력했고, 아이들도 그렇게 살아가길 기도해 왔다.
설연휴. 식탁에 마주 앉은 3대가 서로 많이 먹으라며 옥신각신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배부름을 느꼈고, 그런대로 괜찮은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나의 숨죽인 소원이 특히나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부모님을 하행선 기차까지 배웅하기 위해, 다시 찬바람과 가는 눈발이 날리는 기차역 통로를 검소하고 초라한 옷으로 무장한 부모님, 아내, 내가 걸어가고 있다.
초라한 옷인들 어떠하리. 추운 겨울날, 차가운 바람을 막아낼 외투를 걸쳐 입고 날리는 눈자락을 이겨내면 그만인 것을.
서편제의 주인공들이 길게 이어지는 시골길을 흐드러지게 구성진 가락을 뽑으며 줄줄이 걸어가듯, 우리도 삶자락의 한 부분을 한겨울을 이겨낼 화려하지 않은 옷을 입고 따듯한 마음으로 줄줄이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