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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리빙: 어떤 인생

일상에서 떠올린 단상

by 소호

여기 한 인간의 어떤 인생이 있다.


영국의 런던시청에서 관리자로 근무하고 있는 초로의 남자가 사람이다.


그는 런던 교외에서 아들 내외와 함께 살며, 매일 정시에 열차를 타고 직장인 런던시청으로 출근한다.


인근에 사는 부하직원들도 같은 시간에 같은 열차로 출근하지만, 이 남자는 항상 혼자서 다른 칸에 앉는다.


그는 꼿꼿한 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고 어떠한 일에도 감정 없이 무덤덤하게 일처리를 하는 전형적인 공무원이다.


서민들이 사는 동네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는 엄마들의 수년간에 걸친 민원을 시청의 각 부서마다 자기 일이 아니라며 거절하고, 서류가 돌고 돌다 이 남자의 부서에 오게 되지만 그도 마찬가지로 잔뜩 쌓인 서류더미 위에 무관심하게 올려놓는다.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서 앞으로 살 수 있는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통보받는다.


평생 처음으로 일찍 퇴근하여 불 꺼진 집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집에 돌아오는 아들 내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서둘러 재산을 물려받아 살고 있는 집을 나가자는 부부의 대화가 선명히 들려온다.


그 남자는 유일한 혈육인 아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려고 했으나 딴 곳에 관심을 가진 아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우울한 마음에 훌쩍 떠난 휴양지에서 염세주의적인 삶을 사는 젊은 남자를 우연히 만난다.


갑자기 결근을 한 후 며칠째 출근하지 않는 그 남자의 행동에 부하직원들은 놀라고, 그는 젊은 남자와 술집을 전전하며 평생 해보지 못한 일탈에 빠져본다.


며칠간의 일탈 뒤. 비가 무척 많이 내리는 날 런던으로 돌아온 남자는 다시 출근하자마자, 서류더미 위에 올려놓았던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던 민원의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 직원들을 데리고 빗속을 꿰뚫으며 앞장서 걸어간다.


그 남자는 그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 내에 놀이터를 만들어 주기 위해 혼신을 다한다. 부정적인 타 부서와 상사를 설득하고, 놀이터를 짓기 위한 공사를 직접 진두지휘한다.


놀이터가 완성된 후 어느 깜깜한 저녁.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달빛 아래의 놀이터를 한참을 바라보던 남자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한다.


아들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에 당황한다. 그리고 그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혼자서 외롭게 죽어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한다.


어느 날. 우연히 본 영화에 큰 감동을 받았다. 삶이란 세상 어느 곳이든, 어느 시대이든 비슷하지만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고 존재하고 있다.


본인의 삶의 가치를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캄캄한 밤 형광등이 켜지듯 삶에 큰 충격을 받게 되면 그제야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아들의 마음과는 다르게, 그 남자는 은은한 달빛에 비치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놀이터를 즐겁게 이용할 아이들을 상상하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그네의자에 앉아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스르르 눈을 감았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관계의 끈을 끊어 버리고, 자신의 삶의 걸작을 희미해져 가는 눈동자에 마지막 잔상으로 남겨 놓으며.


이렇게 또 하나의 어떤 인생이 사라져 갔다.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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