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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사랑에 관하여

일상에서 떠올린 단상

by 소호

어느 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런저런 대화 중에 성향과 취미가 비슷한 친한 후배로부터 소설 몇 권을 추천받았다. 그 후배와는 독서를 좋아하고 그중 소설을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아 자연스레 각자 가슴에 남아있는 작품들을 추천한 것이다.


후배는 사랑을 주제로 한 필립 로스, 줄리안 반스, 박민규의 소설을 추천해 주었고 술이 얼큰하게 오른 상황에서도 나는 휴대폰에 부리나케 메모하여 다음 날 즉시 구매하였다.


'사랑'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문학과 예술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표현된 주제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간 소설들의 내용은 한 노인이 바라보는 인생에 쌓여온 사랑과 죽어가며 느끼는 사랑에 대한 소회, 젊은 청년이 유부녀와의 사랑에서 는 열정과 절망, 중년의 남성이 젊은 여성과의 사랑에서 험하는 열망과 슬픔, 한 여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변화 등 읽는 책마다 '사랑'을 작가들마다 다른 방향과 다른 의미로 그려내었다.


뇌과학자들은 사랑이란 단지 호르몬의 작용으로 인한 뇌의 작동 현상이라 말하지만, 르몬으로 인한 감정으로만 치부하기에는 고대로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의 '사랑'에 대한 절한 묘사와 끝없는 애달픔은 크고 깊다.


학창 시절 등교시간.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올라타 간신히 자리에 앉아, 옆에 선 여학생의 가방을 내 무릎 위에 얹어 놓고 있노라면, 여학생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괜스레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영학과에 여학생이 많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많은 남자 동기생들이 여학생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였지만, 나는 졸업할 때까지 여학생들과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했다.


직장 초년의 청년시절에도 선배 여직원이 나에게 관심 있어하는 여직원이 있다고 넌지시 귀띔해 주었지만, 얼굴만 붉히고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


그렇게 숙맥이었던 나도 곰곰이 되짚어 보면, 국민학교 시절 치감치 짝사랑이란 걸 해봤던 것도 같다. 내 기억으로는 하얗고 동글동글하고 예쁘장한 얼굴, 아담한 몸매를 가진 발랄한 성격의 그녀와 6학년 한 해를 같은 반으로 보냈다.


우리 집과 골목길로 잇닿은 낮은 지대에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이 있었고, 등하교하며 그 집을 지나칠 때마다 혹시 집을 나서는 그 아이를 마주칠까 봐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그녀를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지만, 내성적인 나의 성격 탓인지 내놓고 대화하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여학생들이 나와 그녀의 이른바 '썸'을 눈치챘는지, 나에게 그녀는 머리를 묶는 것이 예쁘다고 말해보라고 부추겼고, 어리숙한 나는 평소에는 말도 잘 붙이지 못하던 그녀에게 "너는 머리를 묶는 것이 예뻐"라는 말을 내던지고 말았다.


다음 날. 그 아이는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등교하였고 우리 반에는 그녀와 내가 서로 좋아한다는 소문이 쫘악 퍼졌다.


그 시절 가슴 설레기도 하고 밉기도 했던 그 아이들이 지금은 어디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랑'이란 단어를 들으면 가슴 뛰었던 그때가 가끔 생각나곤 한다.


결국은 나의 수줍은 성격 때문에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하고, 중매로 지금의 아내와 만나 수십 년 살아가고 있다.


되짚어 보면, 열렬한 사랑대신 나의 성격과 딱 맞는 사람과의 평안한 사랑을 수십 년 해온 것이 나의 사랑방식에 더 어울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을 읽거나 주변의 이른바 '뜨거운' 사랑을 지켜보았지만, 달뜨고 열정적인 사랑의 끝은 절망과 서로에 대한 상처로 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생각이 그러하다고 해서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내던질 수 없으며, 찬란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해볼 기회와 용기가 없었던 '사랑의 패자'인 나의 넋두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뜨거운 사랑을 못해본 사랑의 패자로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평안하고 잔잔한 사랑이지만, '사랑'도 많은 '사랑'의 형태 중 하나이므로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이러한 사랑이 계속되길 라는 마음은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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