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떠올린 단상
출근길.
어제 저녁 불어 치던 바람 탓인지, 아파트 상가 앞 보도블록 위에 하얗게 점점이 벚꽃 잎이 떨어져 있다. 꽃잎을 밟지 않으려 해도, 작은 연못만 한 면적에 하얀 점으로 가득 흩어져 있는 벚꽃 잎을 즈려밟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불어와 숱 없는 머리카락을 뒤엎는 바람을 마주하다, 내 폐에 점점이 뚫린 하얀 구멍으로 거센 바람이 들락이는 것 같아 가슴이 갑자기 허전해진다.
매년 벚꽃이 피었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 비바람에 땅 위 곳곳마다 하얀 점을 몽땅 찍어 놓고,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으깨어져 사라져 가는 벚꽃 잎은 나의 얼굴에 검은 버섯을 하나 둘 늘려가며 사라져 가는 세월의 표징이다.
짙은 주름살에, 이곳저곳 아픈 곳 투성이에, 힘없어진 메마른 근육으로 느리게 걷는 늙으신 부모님이나, 직장 초년생으로 왕성하게 일하고 이성을 사랑하고 있는 젊은 자녀들이 어느샌가 눈앞에 서있다.
때로는 급한 격류처럼, 때로는 고고한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을 따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늙어가고 있다.
나는 당분간 활짝 웃지를 못한다. 없어진 3개의 이빨이 있던 공간이 검게 보일까 걱정스러워서다. 금으로 뒤덮여 반짝이는 이빨도 부담스럽지만, 검은색 빈 공간은 너무 초췌해 보일까 두려웠다.
8년 전, 동네 작은 치과에서 못쓰게 될 때까지 써보라고 치료해 줬던 이빨 3개가 이제는 수명을 다했다며, 욱신거리고 구취를 풍겨댔다.
치과의 웅웅 거리는 기구 소리며 치료비가 무서워 버티고 버티다, 결국 뽑아내고 임플란트를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평생 수많은 음식물들을 씹어내느라 수고했으니 이제는 하나씩 병들고 스러져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리라.
문득 몇 년 전 대만여행에서 보았던 수많은 풍파에 깎이어 특이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뽐내던 기암들이 생각났다.
이빨, 손가락, 무릎관절, 허리 등등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고마움을 모르고 함부로 써오던 몸덩어리의 부품들이 하나 둘 낡아가며 삐걱이고 있다.
아이들을 낳고, 길러내고, 마음고생하던 아내는 진즉부터 이곳저곳이 삐걱여 정형외과니 한의원을 수시로 들락거린다.
이빨을 뽑고 지혈을 위해 두꺼운 가재를 입안 양쪽에 한가득 물고 치과 대기석에 앉아 있다가 불현듯 오래된 일이 생각났다.
직접 말씀을 드리진 못했지만, 부모님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구취가 날 때도 있었고 씩 웃으시면 이빨 빠진 빈 공간이 유난히 검어 보여 왠지 추레해 보일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지금의 나처럼 아픈 이빨을 견디고 계셨거나, 견디다 못해 이빨을 뽑으신 것 아니었을까 싶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부모님의 이빨 빠진 검은 공간과 구취가 나의 것이 되고, 나의 일과 사랑이 아이들 것이 된다.
매년 땅바닥을 하얗게 물들이는 벚꽃 잎이 똑같은 벚꽃 잎이 아니듯, 그 꽃잎을 즈려밟는 사람들도 작년의 사람들이 아니다. 1년씩 늙어진 사람들이 지나가므로.
흐르는 세월 속에 부모님도, 우리 부부도, 아이들도 늙어가고 사진 속 얼굴들이 변해간다. 올해의 벚꽃 잎도, 내년의 벚꽃 잎도 계속 나의 발에 밟혀가며 그렇게 세월이 뭉개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