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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아버지의 생일

일상에서 떠올린 단상

by 소호

무더운 날들이 벌써 왔다.


이날은 여름장마처럼 큰비가 예고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달리는 차밖으로 어둑한 구름이 진을 치고 뒤를 쫓는다.


출발 전부터 자동차 연료가 곧 떨어질 것 같아, 서둘러 휴게소에 들렀을 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휘발유를 채우고 다시 출발하는 차창으로 거세진 빗줄기가 투두둑 부딪치고, 옆에 앉은 아내는 "비가 많이 내리네"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아버지와 본인의 생일이 비슷해 자신의 생일이 늘 치인다며근슬쩍 투정을 부렸다.


그래도 매번 내 아버지의 생신축하 자리에 동행해 주는 아내가 고맙다.


사실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는 아직도 어색하다. 아버지와 나 둘 다 부전자전인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내향적인 편이라 한두 마디 인사말을 건네고 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많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보면, 각자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환경 탓도 꽤 큰 듯하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직장을 얻어 상경한 후 각자 독립된 삶을 살아 삶의 경험공유가 많지 않았던 환경에서 일 년 중 두세 번 만나다 보면 이야깃거리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 아닐까.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도 그렇지만, 나와 두 아들과의 관계도 비슷한 것 같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고 나서는 부모의 간섭, 특히 아빠의 간섭을 싫어했다. 어쩌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의 생각 차이로 감정이 나빠지기만 하여 그 이후로 아이들과의 대화를 줄이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장성하면서는 각자의 삶으로 바빠 이야기를 나누는 횟수가 자연적으로 적졌다.


이제 곧 두 아들이 독립하고 나면 대화할 기회는 더욱 적어질 것이고 지금의 아버지와 나와의 모습이 될 것이 자명해 보인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계속 나와는 다른 시간들 속에서 다른 삶을 살아갈 아이들에게 예전의 나의 삶의 기준과 희망사항을 들이대고 싶지는 않다.

그들이 독립하여 분가하고 나면 둥지를 떠난 새처럼 각자의 삶을 각자의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므로 그들의 생각과 의지에 반하는 의무를 부여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떻게 삶을 살아가라고 이야기하거나, 명절, 부모의 생일 등을 빙자하여 전화 및 방문을 재촉하는 행위들을 하지 말자고 아내를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어느 주말. 오랜만에 아이들과 같이 제법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외식을 하고, 커피숍에 들러 커피 한잔 하고, 다 같이 귀가하는 중에 옆에 있던 아내의 "아! 행복해"라는 문장이 들려왔다.


나와는 다르게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아내를 보고 있노라면, 그간 공을 들여온 자식들과 독립된 노년의 삶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비를 무릅쓰고 도착한 고향집. 오래된 고향집에 이제는 늙수그레한 자식들과 장성한 손주 몇이 모여,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드렸다.


케이크에 꽂은 초가 가득하여 한번에 불어 끄기 힘들어 보였지만 아버지는 기뻐하셨다.


"이 늙은이 생일이 뭐 중요하다고, 힘든데 이렇게 모였어?"라고 중얼거리시면서도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였다.


환한 미소의 아버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나의 아이들로부터 독립된 노년의 삶이 아내는 물론이거니와 나까지도 힘들어지는 것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가급적 아이들과 떨어져, 나의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 하나 둘 지워지는 전화번호 속에 도드라지게 남은 몇몇의 친구들과 함께 고요히 흐르는 시간을 벗하여 밝은 미소로 살아가고자 하는 나의 꿈을 이루고 싶다.


그러다 어느 날 부모들이 그립다고 두 팔 벌리는 아이들을 보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반갑게 안아주고 쓰다듬어 위로를 건네주면 그 이상의 흡족함이 없을 듯하다.


어둑한 저녁. 비는 멈췄지만 습기를 잔뜩 머금은 길을 달려 서울로 올라오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아내의 얼굴을 한 번씩 훔쳐본다.


순간 두 늙은 노인이 조그마한 집 거실에 앉아 미소 지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미래가 내 머릿속을 쩍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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