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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May 15. 2022

술 사달라던 주무관

저는 조직에서 꼰대와 MZ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나이나 직급뿐 아니라 성격 마저도요. 그러다 보니 저녁에 회식이 있으면 빠짐없이 참석하지만 또 열심히 도망가려고 합니다. 상급자나 선배에게는 저녁에 회식이 있으면 불러달라고 하면서, 정작 하급자나 후배에게는 미안해서 저녁 먹자고 말을 못 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태도 때문에 어떤 주무관에게는 오해를 사기도 했었습니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남자 주무관과 같은 계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이도 동갑이어서 서로 좀 편한 사이었죠. 과장님께 혼나고 나면 둘이 밖에 나가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과장님 욕을 하고 그랬었죠. (지금은 담배를 안 핀지 몇 년이 넘었습니다) 그때 업무가 유별나게 어렵고 힘들었기 때문에 둘이 고생하면서 많이 친해졌습니다.


어느 날 주무관이 말했습니다. 자기가 술 좋아하는 거 알면서 왜 저녁에 술 한번 안 사주냐고. 저는 지나가며 하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아무리 편한 사이라도 퇴근 후에 직장 상사랑 술 먹는 걸 좋아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술자리를 좋아하시는 과장님께 딱 똑같이 말했습니다. (같이 술 먹긴 싫지만 당신에게 호의적이란 걸 표현하기 위해 예의상 하는 말로) 과장님 오랜만에 저녁에 술 한잔 하셔야죠 이렇게요. 주무관도 똑같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바쁜 일만 지나가면 한 잔 하자며 형식적으로 답했죠.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주무관이 저에게 섭섭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사무관님 어제도 다른 과원들이랑 술 마셨다면서요, 왜 저는 안 불렀어요? 혹시 저 일 못한다고 싫어해요? 전 깜짝 놀랐습니다. 함께 일하는 사이여서 부담될까 봐 일부러 안 물어본 것이었는데, 오히려 자기를 싫어한 것으로 보였나 봅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바로 저녁을 같이 먹었죠. 참고로 그날 둘이서 치킨에 소주  몇 병을 마시고 필름이 끊겼습니다. 아마 그 주무관이 저에게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까지 기억이 안 나네요.




사회생활이 참 어렵습니다. 저도 마음에 없는 소리로 술 사달라고 한 적도 있으니깐, 상대방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상대를 배려한다고 저녁 자리를 피하면, 주무관 입장에선 용기를 냈는데 거절을 당해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단 걸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덥석 같이 먹자고 했다간 저 사무관 눈치도 없냐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명확한 답이 없네요. 그때그때 상황과 맥락을 보고 파악해야 하는데, 저 같은 공돌이에게는 그게 제일 어렵습니다. 프로그래밍 같이 "if (n > 2) then 저녁을 사준다" 이런 식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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