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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은 Oct 11. 2022

흔한 언어 폭력 이야기

가해자는 핑계가 없어야 한다

첫째는 예민하면서도 둔감하고 섬세하면서도 거친 아이다. 작은 것들에 대한 기억력이 좋아서 거의 완벽하게 복기를 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들은 그저 귀찮아서 잊어버리기도 하는 자기중심적인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까지 한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2학년 1학기가 되어서도 글쓰기를 힘들어했다. 외국어는커녕 국어도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민이 컸었다. 읽고 쓰는 것과 사회 발달이 느린 아이였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불필요한 오해를 사거나 잘못을 뒤집어쓰는 경우도 많았다. 지능검사를 포함한 풀배터리 검사를 받았는데 아이의 지능지수는 160 미만으로 영재는 아니지만 아주 예민한 성격을 가진 아이였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글쓰기 숙제가 계속 나왔지만 아이는 숙제의 수준을 따라갈 수 없었다. 진지하게 유급을 고민했지만 담임 교사는 적극적으로 말렸다. 나는 언어적으로 준비가 덜 된 학생까지 전과목 평균의 평준화를 위해 밀어붙이는 학교의 수업 방식에 분노했고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하는 대한민국의 입학 연령을 원망했다. 아이의 자퇴에 관하여 배우자와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언스쿨링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할 무렵 아이는 놀랍게도 학교 생활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학생이 생겼고 함께 어울려 놀기도 했다. 초등 고학년이 되자 학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에 보통은 혼자 놀다가 친구들 학원과 학원 사이 쉬는 시간에 만나 노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좀 더 나은 사회성을 위해 학원을 다녀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놀 시간도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그렇게 아이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을 때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의 반에는 덩치가 큰 여학생이 있었다. 성조숙증과 과체중으로 고민하던 여학생의 부모는 잘 알고 지내는 이웃이었다. 어느 날 여학생의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첫째 아이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신체적 비하를 했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시절 학교에서는 큰일이 있었다. 한 남학생이 같은 학년 여학생의 속옷에 손을 집어넣었다는 여학생의 주장으로 남학생이 전학을 가게 된 것이었다. 그 일 이후로 학교는 성교육에 최선을 다했고 잊을만하면 한 번씩 관련 연수를 했다. 학생들도 남의 몸에 허락 없이 손을 대는 것은 좋지 못한 행동이고 성별이 다를 경우 성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괴롭힘의 유형은 좀 더 은근해졌다. 


쪽지에 특정 학생을 비난하는 말을 적어 돌린다던가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은 유령 취급하기 등 괴롭힘과 놀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내 아들은 그런 일에서 제외되어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저학년 시절에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의 감정이 있으니 타인에게 그러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남학생들 여럿이 여학생의 덩치를 놀리고 비웃었고 나의 아들은 그중 제일 독하고 상처받을 말을 내뱉었다고 했다. 믿을 수가 없어서 귀가한 아이를 앉혀놓고 한참을 물었다. 정말이냐고, 네가 그런 말을 했냐고. 처음엔 아니라고 하다가 한참 뒤에 아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다들 그런 말 하는데? 내가 크게 잘못한 것 같진 않아. 어디 다친 곳도 없고 그런데 뭐가 문제야?'


눈에 보이지 않은 상처는 상처가 아니라는 아이를 앉혀놓고 한참을 이야기해야 했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경계는 다 다른데 꼭 신체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닐지라도 상대방은 불편하거나 위협을 느낄 수 있다고 말이다. 네가 잘 인지하고 있는 신체적 경계처럼 동의 없이 상대방의 휴대전화를 함부로 보는 물리적 경계나 싫다고 하는 말을 상대방에게 하며 불쾌감을 유발하는 언어적 경계 그리고 놀리면서 눈으로 신체를 바라보는 시각적 경계 모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경계를 허물고 함부로 침범하는 순간이 바로 폭력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는 피해자가 납득하는 순간까지 계속 사과를 하기로 결정했다. 여학생과 부모가 동석한 자리에서 사과편지와 선물을 건네고 다시는 신체 부위를 두고 놀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나는 여학생의 부모를 만날 때마다 사과를 했다. 같은 동네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만날 일이 잦았다. 놀이터, 시장, 공원, 도서관 등 스쳐 지나가는 모든 장소에서 나는 인사와 함께 여학생이 그때 그 일로 상처받지 않았는지를 묻고 내 아들의 행동을 사과했다. 피해 여학생의 엄마가 어느 날 말했다. 아이들이 실수로 그런 일인데 다음부터 안 그러게 주의하면 될 일이라며 더 이상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이다. 그 이후로는 별다른 사과 없이 평범한 동네 주민으로 지내게 되었다.


나는 내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학생이 뚱뚱한 게 문제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한 게 잘못이 아니라 자기 관리가 부족했던 게 문제가 아니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끼리 놀다 그럴 수 있는 일인데 왜 그리 예민하게 구느냐는 타박도 하지 않았다. 뒷자리에서 여학생에 대한 소문도 내지 않았고 관련 이야기를 할 때도 여학생의 이름은 올리지 않았다. 엄연한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여학생의 부모는 나의 아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사과 편지와 미안함을 담은 선물, 그리고 만날 때마다 하는 사과에 마음을 풀었던 것 같다.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관련 사건에 대해 내 아들의 이름으로 동네에 떠도는 소문이 전혀 없으니 여학생의 부모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다. 


학교 교사에게는 내 아들과 몇몇 남학생들이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주의 및 관련 교육을 부탁드린다는 편지를 보냈다. 해당 여학생의 이름을 적어 카페테리아에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부탁했다. 모든 초등학교는 학교 폭력 예방 프로그램이 있다.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을 분리 조치하고 가해 학생은 교사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며 사고를 방지하는 것이 우리 학교의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아들의 문제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힘들지만 학교 외부에서 있었던 학생들의 문제를 내 입으로 교사에게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해 학생의 엄마였다. 언어폭력을 가했으니 가해 학생이란 말이 붙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아이 인생에 걸림돌이 되면 어쩌냐고 그럴 땐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철없던 시절 나쁜 짓을 했다가 어른들의 개입과 교육으로 고쳐진 일은 걸림돌보다는 자산에 가깝다. 잘못을 저지르고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법을 터득한 아이가 성인이 되어 똑같은 일을 저지르거나 더 크고 나쁜 일을 저지를 때 인생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고 본다. 


지금이 아니면 바로 잡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사람마다 갖고 있는 경계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배우고 익혀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언어폭력조차 범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한 학생들이 어떻게 타인의 신체를 함부로 훼손하고 영상을 촬영해 퍼트리는 성범죄에 가담할 수 있겠는가. 언어폭력이나 신체폭력, 성폭력은 모두 갈래는 다르지만 결국 인간 존중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에서 인권 교육을 하고 장애인 교육을 하며 다문화 가정을 배우고 성교육을 받는다. 나는 그런 관점에서 내 아들의 잘못을 학교에 알리는데 두려움이 없었다. 


이쯤 되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부모 입으로 자기 자식의 문제점을 학교에 알린 것은 가해 학생으로 낙인찍은 행동일 텐데 학교에서 아무 일 없었냐는 질문을 받았다. 교사들은 한 번의 잘못으로 학생의 태도를 넘겨짚지 않는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런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교사를 만난 적이 없다. 아들은 무수히 많은 '노력 요함'이 찍힌 성적표와 과기부 장관상, 그리고 여가부 장관상을 받고 무사히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말하기는 여전히 연습 중이지만 과거 피해 여학생에게 했던 것처럼 악의를 가지고 놀리는 짓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비록 나이스에 적혀있는 내용에는 부족함이 많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긍정적인 내용도 늘고 있고 무엇보다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학교 폭력에 연루되어 있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받지 못했다. 


가끔은 상상한다. 지나가는 여학생을 놀리는 언어폭력이 아닌 그보다 더 크고 심각하고 질 나쁜 폭력을 저질러도 나는 나의 아들을 고발할 수 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자식의 허물이 어디까지인지 경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납득 가능한 수준, 몇 번의 인사로 지나갈 수 있는 잘못은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하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부모인 나는 아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 숙여 사과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더 이상 교정하기 어려운 20대 청년이 되어 저지른 잘못을 앞에 두고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나의 아들은 아직 20대가 아니다. 교정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에 노력하는 만큼 바뀔 가능성도 크다. 공부에는 때가 없다. 통신교육과 평생교육원이 자리 잡은 시대니 언제든 원할 때 원하는 과목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성이나 인권 교육에는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어린 시기부터 잘잘못을 구분하고 제대로 된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법망을 잘 피해 다니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괴물이 될 수도 있고 사회 구성원으로 제대로 합류하지 못했을 때 원망을 남에게 돌리며 타인을 괴롭히는 루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0대인 나의 아들이 교정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키우는 것이 나의 목표다. 부모가 사회적 규범을 거스르고 자식을 위해 법망을 피해가야 할 지옥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아이의 잘못을 숨기지 않을 생각이다. 가해 학생, 가해자 부모라는 말에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워하지 않겠다. 하지만 잘못을 시인하고 제대로 된 사과를 했을 때는 누구보다 따뜻하게 안아줄 것이다. 아이의 밝은 미래를 위해 엄마인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밖에 없으니까. 

아이에게 스스로 저지른 잘못을 바라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명백한 월권이다. 
그런 부모는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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